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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 들어 부쩍 자주 언급되는 단어가 있다. 국격이다. “이번 국격 훼손은 국제적 망신을 넘어 국익 훼손까지 이어질 수 있다.” 이정미 정의당 대표가 국제노동기구(ILO)의 화물연대 파업 개입을 두고 한 말이다. “국격이 무너진 일주일. 윤석열 대통령은 국민께 사과하기 바랍니다.” 지난 9월 윤 대통령이 해외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기 직전에 나온 더불어민주당의 논평이다. 대통령실이 언급한 사례도 있다. 윤 대통령이 월드컵 대표팀 환영 만찬을 여는 등 묵혀뒀던 청와대를 잇달아 사용한 후 대통령실은 국격에 맞는 행사에는 청와대를 활용하겠다고 밝혔다.

국가의 품격을 평가함에 있어 내부의 왈가왈부보다는 외부의 시선이 더 중요하다. 정략적 편들기나 비판보다는 한 발 떨어진 국제사회의 평가가 더 객관적이다. 윤 대통령도 7개월 전 취임사에서 “국제사회에서 존경받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최근 나오는 국제 비정부기구(NGO)의 평가를 보면 한국은 존경받는 나라인지 의심스럽다. 오히려 노동권, 언론자유, 기후대응 등 품격 있는 사회가 갖춰야 할 핵심 덕목에서 후퇴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안전운임제 연장을 요구하며 파업에 나섰던 화물연대 노동자들은 정부의 압박에 결국 빈손으로 물러났다. 정부는 이제 파업 피해에 대한 청구서를 노동자들에게 내밀 태세다. 정부는 법과 원칙의 승리라고 자평하지만 외부의 시선은 다르다. ILO는 화물연대에 대한 정부의 업무개시명령과 관련해 사무총장 명의 서한을 보내 긴급 개입했다. 결사의 자유를 언급하며 노동기본권 침해 우려를 제기한 것이다. 한국은 ILO 기본협약 비준국이어서 해당 협약은 국내법과 동일한 효과를 갖는다. 하지만 정부는 ILO의 개입을 “의견조회” 치부하며 무시했다. “떼법” “조폭” 등의 표현은 현 정부의 반노동 성향을 보여준다. “손발 노동은 아프리카에서나 하는 것”이란 윤 대통령의 후진적 노동관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이에 발맞춰 교육부는 교과서에서 ‘노동자’라는 표현을 아예 지워버리는 교육과정 개편을 추진하고 있다.

프랑스 파리에 본부가 있는 국경없는기자회(RSF)는 현 정부의 MBC를 상대로 한 차별적 조치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RSF는 정부의 MBC에 대한 언어적 공세와 전용기 탑승 불허 등 차별적 조치가 “국민의 알권리를 위협하고 언론인에 대한 괴롭힘을 조장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RSF 관계자는 국가 정상이라고 해서 어느 언론이 자신의 활동을 보도할지, 어떻게 보도할지, 무엇을 물어볼지를 정해서는 안 된다며 윤 대통령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세계 146개국 187개 매체의 언론인 60만여명이 가입한 국제기자연맹(IFJ)도 대통령과 정부의 비판적 보도에 근거한 언론 배제를 규탄했다. ‘이 XX’ 발언이 논란이 된 지난 9월 ‘핫 마이크’ 사건만으로도 윤 대통령은 이미 국제적 망신을 당했다. 그런데 대통령실은 이를 해명하면서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라고 말했다는 ‘대안적 사실’을 제시하며 놀림거리가 됐다. 그것도 모자라 MBC 취재진의 대통령 전용기 탑승을 거부하는 뒤끝까지 보이며 또다시 비판을 자초했다.

기후 민폐국이란 평가는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 기업이 사용하는 전력의 100%를 재생에너지로 충당하는 RE100 캠페인을 주관하는 클라이밋그룹은 지난달 대표 명의로 윤 대통령에게 한국 정부의 재생에너지 축소 정책을 강력히 항의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 밖에 정부의 여성가족부 폐지 방침에 대해서도 국제 시민단체들은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국내 461개 인권시민사회단체 대표단은 지난달 유엔 제4차 국가별 인권상황 정기 검토를 앞두고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프리세션에 참석해 이태원 참사에 대한 정부의 책임 있는 조치를 요구하고, 현 정부 출범 이후 인권 정책이 후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몇 년 전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는 미국의 품격을 내동댕이쳤다는 비판을 받았다. 국제적 합의를 무시하고, 비판적 언론은 가짜뉴스라고 배척하고, 여성·환경·노동 정책은 후퇴시켰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에 대한 초기 평가도 그와 비슷한 듯하다. 국격이란 단어가 비판적 의미로 자주 등장하는 것은 그 방증이다. 국민 입장에서 정부 행태가 자랑스럽기보다는 부끄러울 때가 더 많다는 의미다. K팝, K드라마, K푸드만큼 K정치, K대통령도 국가 품격 제고에 기여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장애물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박영환 국제부장 yhpark@kyunghyang.com>

 

 

연재 | 아침을 열며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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