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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해임건의안이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주도로 지난 11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미 지난 9월 박진 외교부 장관 해임 건의를 거부한 바 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이에 야당은 이 장관 탄핵소추안 카드까지 꺼내들 기세다. 여당인 국민의힘은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를 보이콧할 것처럼 격앙하고 있다. 여당은 이 장관이 물러나면 마치 윤석열 정부가 무너질 듯이 옹위에 나섰다.

한낱 정무직 장관 자리를 놓고 여야가 내년도 예산안 통과조차 뒤로 미뤄놓은 채 격돌하는 배경은 무엇일까. 윤석열 정부에서 이 장관의 위상이 상상 그 이상임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충암고 선후배인 윤 대통령과 이 장관 사이에 얼마 전 상징적 모습이 연출됐다. 지난달 윤 대통령이 캄보디아로 출국하는 공항에서 이 장관의 어깨를 두드려 준 장면이다. 

이태원 참사 이후 야당은 이 장관 경질을 요구했다. 여당 내부에서조차 이 장관 자진 사퇴를 주장하기도 했다. 대통령이 이태원 참사 후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이 장관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을 것이라 ‘착각’할 수도 있었던 그 순간, 오히려 대통령은 어깨 두드림으로 ‘깊은 동문 사랑’을 보여줬다.

기존 정치문화로 봤을 때 대형 참사로 158명이 희생됐다면 안전을 책임지는 장관이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마땅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는 달랐다. 윤 대통령은 이태원 참사의 법적 책임만 강조하며 이 장관을 두둔했고, 이 장관은 재난대책TF 단장을 스스로 맡겠다고 나섰다. 참사에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할 인물이 향후 안전사고 예방 대책까지 수립하겠다고 나선 꼴이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은 더욱 끈끈한 정을 보였다. 이렇게 보면 두 사람의 관계는 대통령과 장관 사이가 아니다. 충암고 8회 졸업생 선배와 12회 졸업생 후배 사이다. 바로 이것이 이 장관이 행안부 장관직에서 꿋꿋하게 버티는 이유로 해석된다.

두 사람 중 먼저 정치판에 나선 것은 판사 출신인 이 장관이었다. 2012년 박근혜 후보 캠프에서 이 장관은 정치쇄신특위 위원에 임명됐다. 이 장관은 특위 위원장이었던 안대희 전 대법관의 측근으로 정치무대에 나섰다. 이후 이 장관은 박근혜 정부에서 국민권익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는데, 이렇게 보면 정치판에서 이 장관은 윤 대통령보다 한참 선배다. 사법시험 합격에서도 이 장관은 윤 대통령을 앞섰다. 이 장관은 대학 재학 중 사시 28회에 합격했고, 윤 대통령은 몇수 끝에 33회에 뒤늦게 합격했다.

하지만 고교·대학 선배인 윤 대통령 앞에서 이 장관은 그냥 후배일 뿐이다. 아직도 권위적·수직적 관계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고교 동문회의 기수문화에서 가능한 일이다. 이 장관은 윤 대통령의 대선 캠프와 후보 비서실에서 정무위원을 맡아 최측근으로 가는 징검다리를 만들었다. 당시 캠프 내에서 충암고 선후배는 윤 대통령의 1년 선배인 김용현 대통령 경호처장과 함께 두 명뿐이었다. 대선 후에도 동문회 출신 중 요직에 앉은 이는 두 사람뿐이다. 과거 정권의 ‘육사 동문’ ‘경북고 동문’ 등과 비교하면 굳이 ‘동문회 정치’라고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지만 현 정부의 권력 역학 관계를 보면 그렇지 않다. 이 장관은 행정부처에서, 김 처장은 대통령실에서 막강한 파워를 보이고 있다. 이 장관은 경찰의 독립성·중립성을 훼손하는 경찰국 신설을 떠맡고 나서면서 윤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부상했다. 김 처장은 대통령실 이전 TF를 이끌며 용산 이전을 주도했고, 법적 논란을 무릅써가며 경호처가 군·경찰 지휘·감독권을 행사하도록 하는 대통령경호법 시행령 개정 작업을 강행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첫해에 30% 안팎의 지지율은 대한민국 정치가 얼마나 험난한지 여실히 보여준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말 잘 듣는 후배를 앞에 내세우는 동문회 정치로는 험난한 정국을 결코 헤쳐나갈 수 없다. 이 장관은 이태원 참사에 대해 제대로 사과할 시기도 놓치고 책임만 회피하더니 ‘폼나게’ 물러날 시기도 놓치는 바람에 지금은 윤석열 정부의 가시밭길 행군에서 맨앞에 깃발을 들고 서 있다. 정치적 능력을 의심받는 대통령이 선택한 동문 후배가 무능한 정치인이라면 최악의 선택이다.

동문끼리 어깨동무하는 것은 정치의 영역이 아니다. 대통령이 속 깊은 대화를 나눠야 할 대상은 동문 후배가 아니라, 야당 정치인이고, 그리고 국민이다. 동문 후배를 내세워 정국을 돌파하려는 것은 정치적 고집에 불과하다. 눈을 씻고 주위를 잘 살펴보면 유능한 정치인들이 많다. 윤 대통령은 지금이라도 오기의 동문회 정치를 거둬들여야 한다.

<윤호우 논설위원 ho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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