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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대선에서 정의당 후보(심상정)가 201만7458표를 얻었다. 진보정당 대선 도전 25년 만에 200만표를 넘어섰다. 기존 진보정당 지지층과는 결이 다른 불안 노동자, 청년, 여성, 소수자들의 지지가 더해지면서 이뤄낸 성취다. 당시 20대 득표율은 전체 득표율의 2배가 넘는 12.7%에 달했다. 노쇠한 진보정당을 떨치게 할 만했다.

한국 정치의 신기원을 연 2004년 4월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정당득표에서 277만표를 획득했다. 모두 10석을 얻어 진보정당으로선 처음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신자유주의에 반발한 2030세대의 적극적 지지가 핵심 기반이 되어 당시 민주노동당 지지율은 15% 안팎을 유지했다. “땀흘려 일하고, 억압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열렬히 대변한 ‘거대한 소수’는 그렇게 진보정당의 황금기를 일궜다.

불행히도 민주노동당의 분당과 이합집산, 끝내 ‘진보’마저 당명에서 사라진 정의당이 원내 진보정당을 잇는 과정은 청년이 중심에서 사라지는 것과 궤를 같이했다. 절로 기존 지지층이 당과 함께 나이를 먹으면서 ‘늙은 정당’이 되어갔다. 2017년 대선 ‘200만표’는 그 퇴행을 되돌릴 불씨를 던졌다. ‘노동이 당당한 나라’에 호응한 노동자, 청년, 여성 등이 가리킨 게 있다. 진보정당의 길이 있음을, 정의당이 누구를 보고 진보정치를 해가야 할지를 보여줬다.

대선 후 2년여, 정의당의 시간은 거꾸로 흘렀다. 계급 의제와 노동을 뒤로 물리면서까지 대중적 외연 확대에 집중했으나 결과는 미약하다. 7% 안팎에 정체되었다가 이제 5%선마저 위협받는 지지율이 아픈 증좌다. “세습자본주의 혁파”든, “불평등과 불공정의 극복”이든 그걸 분명한 대안과 목소리로 실천하지 못한 결과다. ‘6석’ 소수의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선거제 문제를 빼고는 정의당을 소환시키는 이슈가 기억나지 않는다. 국회 특활비 폐지가 원내 진보정당의 최대 성과로 꼽히는 판이다. 무상보육, 무상의료, 무상교육, 경제민주화 등을 의제화시켜 시대정신이 되게 한 과거 진보정당의 결실에 비춰보면 너무 빈한하다. 이명박 정부 첫해인 2008년 대형마트·SSM 규제 입법화에서 ‘소수’ 민주노동당은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물며 지금은 촛불정부 시절이다. 경제사회 개혁 부진과 노동에서의 후퇴 속에서 정의당은 견제도, 견인도, 등대 역할도 다하지 못했다. “민주당이 진보를 과잉대표”토록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정의당이다.

조국 정국을 겪으면서 “정의당 내상이 깊다”(윤소하 원내대표). 내상이 깊어진 건 이른바 ‘데스노트’ 때문이 아니다. ‘조국 사태’가 까발린 불공정과 불평등, 특권 문제를 진보정당의 목소리로 의제화하지 못하고, 청년 세대의 상실감을 직시하지도 못한 때문이다. 조국의 거취를 떠나 불평등과 불공정의 이슈를 진보적으로 대변하고 대안을 제시할  기회를 차버렸다. ‘데스노트’ 등재 여부가 진보정당 역할의 전부인 것처럼 부각되는 과정을 정의당은 대책 없이 따라가기만 했다.

추석 연휴를 지나고 나온 여론조사에서 정의당의 지지율 흐름이 심상치 않다. 리얼미터의 23일 정기조사에서는 2주 연속 하락해 5.3%를 기록했다. 낯뜨거운 집안싸움으로 날새우는 바른미래당에도 밀렸다. 대통령과 여당 지지율이 하락하는 상황에서 정의당도 동반 하락했다. 정의당이 민주당 ‘왼쪽’에서 대안성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징표다.

심각한 건 20대의 정의당 ‘손절’ 조짐이다. 이번 조사에서 20대 지지율은 3.9%를 기록했다. 바른미래당(8.8%) 절반도 안된다. “불평등한 세습사회와 정면으로 싸울 수 있는 정치세력이라는 신뢰를 주지 못한” 업보다.

미국의 버니 샌더스와 오카시오코르테스, 스페인의 포데모스, 영국 제러미 코빈이 이끄는 진보정치는 밀레니얼 세대의 뜨거운 지지를 받고 있다. 프랑스 ‘노란 조끼’ 시위에서도 보듯 청년은 불평등 세습사회에 가장 강력한 저항세력이다. 청년 세대가 정의당을 손절하다시피하게 된 것은 그들이 갑자기 보수화되어서가 결코 아니다.

만일 보수정당의 언저리에서 신진세력이 세습자본주의 비판 흐름 가운데 경쟁의 공정성만 강조하는 쪽과 결합해, 이들이 특권층 견제의 대표성을 인정받고 나면 정치지형을 바꾸기 힘들어진다. 유승민과 안철수 세력의  새 정당 과녁이 그 어간에 있을 게다. 정의당의 책임 방기가 우파 포퓰리즘 부상의 토양을 제공하는 뼈아픈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지난해 7월 국회 비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이정미 당시 정의당 대표는 엄중히 물었다. “민주당은 진보인가. 민주당은 과연 불평등과 불공정을 극복할 정치적 비전과 의지를 갖고 있는 정당인가.” 지금 그 주어 자리에 ‘정의당’을 올려놓고 자문할 때이다.

<양권모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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