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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여적]‘김일성 가면’

opinionX 2018. 2. 12. 14:01

‘페르소나’(persona)는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일컫는 라틴어다. ‘통하여(per)’ ‘소리(sona) 난다’는 뜻으로 입 구멍이 있는 가면에서 유래됐다. 정신분석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은 “자아가 인간의 내면세계와 소통하는 주체라면 페르소나는 일종의 가면으로 사회의 행동 규범과 역할을 수행하게 한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특사 자격으로 방남한 김여정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 북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 등 참석자들과 10일 오후 강원도 강릉 관동하키센터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B조 조별리그 1차전 남북단일팀과 스위스의 경기가 끝난 뒤 선수들을 격려하고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

연극이나 영화, 뮤지컬 등에선 가면을 쓴 배역들이 등장하곤 한다. 가면은 감추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드러냄의 수단이기도 하다. 고려시대 때부터 전해내려 오는 산대놀음은 한국의 대표적인 가면극이다. 양반이나 파계승에 대한 조롱, 서민들의 애환 등을 풍자적인 대사와 춤으로 묘사하는 산대놀음의 배역들은 가면을 쓴다. 이들은 가면을 쓰고 부조리한 세상을 까발리고 비판한다. 산대놀음의 배역들에게 가면은 사회적 발언을 위한 ‘페르소나’였을 수도 있다.

북한 응원단이 10일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첫 경기에서 남성 얼굴의 가면을 쓰고 응원한 것을 두고 ‘김일성 가면’이 아니냐는 억측이 나왔다. 인터넷 매체 ‘노컷뉴스’가 북한 응원단이 남한에도 널리 알려진 가요 ‘휘파람’을 부르며 가면을 쓴 사진을 ‘김일성 가면’이란 설명을 달아 보도하면서 논란이 확산됐다. 통일부는 11일 “북한 응원단이 쓴 가면은 ‘휘파람’을 부를 때 남자 역할 대용으로 사용되는 ‘미남 가면’”이라고 해명했다. 북한 전문가들도 “‘체제존엄’으로 숭배하는 김일성의 얼굴을 오려 응원 소품으로 사용하는 것은 북한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자유한국당·국민의당·바른정당 등 보수 야당들은 “북한 응원단이 사용한 남성 가면은 ‘김일성 가면’이다. 북한에 사과와 재발방지를 요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미남 가면’을 ‘김일성 가면’이라고 처음 보도한 ‘노컷뉴스’가 기사를 삭제하고 오보에 대한 사과문을 냈는데도 보수 야당들은 ‘색깔론 찰떡 공조’를 과시한 것이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남북 관계에 청신호가 켜지는 와중에 뭐라도 트집을 잡고 싶은 보수야당들의 저열한 공세가 아닐수 없다. ‘거짓의 가면’을 쓰고 남을 비판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박구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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