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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히 죄송합니다.” 삼성전자와 삼성물산이 18일 머리를 숙였다. 닷새 전 삼성에버랜드, 전날 삼성전자서비스의 ‘노조 와해’ 공작이 줄줄이 단죄를 받은 뒤다. 삼성의 주력사·지주사가 노사 문제의 재발 방지를 다짐하는 첫 대국민사과문을 낸 것이다. 사과문도 그간 노동 이슈나 판결에 보였던 것과 두 가지가 달랐다. “과거 회사 내에서 노조를 바라보는 시각과 인식이 국민의 눈높이와 사회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음을 겸허히 받아들인다”는 자성이 등장했고, 1심 뒤에 빠르게 사과한 것도 이례적이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 노조는 안된다.” 고 이병철 창업주의 유지가 80년 넘게 흐르던 삼성에 변곡점이 생길지 눈이 쏠린다.

삼성전자서비스 노조 와해 사건 관련 1심 선고가 내려진 지난 1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전국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관계자 등이 입장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2012년까지 삼성은 지속가능보고서에 ‘노조를 조직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한다고 적었다. 임금·복지를 선제적으로 챙기겠다는 뜻이다. 무노조가 논란이 된 그해, 삼성의 노조관(觀)은 ‘근로자 대표를 경영파트너로 인식한다’로 바뀌었다. 하지만 무노조 경영은 법도 세상의 눈도 개의치 않는 ‘그들만의 불문법’으로 지속됐다. 12월 서울중앙지법 두 법정에선 “증거가 넘친다”고 했다. 삼성에선 노조 설립 징후만 포착되면 대응TF와 상황실을 차리고, 동향을 감시하고, 표적감사·해고·위장폐업시키는 공작이 이어졌다고 했다. 급해지면, 노동부·검찰·경찰에도 손을 내밀었다. 6년 전 심상정 의원이 ‘S그룹 노사전략 문건’을 폭로한 뒤에도 겁먹지 않았고, 그 문건대로 그룹 미래전략실이 진두지휘했다. ‘무노조’가 열일 제쳐두고 지켜갈 도그마가 아니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2014년 이건희 회장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졌을 때 그에겐 빛과 그림자가 교차했다. 반도체 신화와 백혈병이다. 그 자각이 지난해 삼성이 고 황유미씨에게 11년 만에 사과하는 반전의 출발점이 됐음직하다. 지난해 삼성전자서비스는 수리기사들을 직고용하며 “노조활동을 보장하겠다”고 했지만, 노조는 지난여름 파업을 했다. 취업규칙만 따지지 말고 단협을 맺자고 한 것이다. 노조 와해 단죄를 받은 삼성은 “미래전향적이고 건강한 노사문화를 정립해가겠다”고 사과문을 맺었다. 진정한 사과는 여기저기서 움트는 노사관계 정상화가 될 터이다.

<이기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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