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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계조 행정안전부 재난안전관리본부장이 20일 청와대 사랑채 스튜디오에서 민식이법 개정과 관련한 국민청원에 대해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20여년 전 인터넷도 포털도 없을 때다. “거기 신문사죠?” 편집국엔 밤마다 온갖 전화가 걸려 왔다. 주로 사회부·편집부 야근자가 받았다. 대통령 나이부터 도개걸윷모가 어떤 동물인지 묻고, 미 대선에서 공화당·민주당 중 어느 쪽이 더 많이 이겼는지 즉답하기 힘든 질문도 있었다. 깔깔 소리가 들리면 십중팔구 술자리 내기였다. 편집국엔 “사람 싸운다” “불났다”는 전화가 왔고, 하소연·제보나 격정 토로도 이어졌다. 신문사는 모든 걸 알고, 어떤 얘기도 듣고 대처해주는 곳으로 아는 사람이 많을 때였다. 방송사도 물론이다. 지금은 제보를 빼면, 신고는 112·119로, 지식은 포털 검색창으로, 하소연이나 격정은 청와대 국민청원으로 옮겨졌다. 억울하고 놀랍고 화난 세상 얘기는 이제 국민청원에 모이고 말을 낳고 기사로도 만들어지는 세상이 됐다.
그 국민청원에서 53만명이나 동의하며 공분한 글이 거짓으로 판명됐다. 지난 3월 ‘평택에 사는 두 딸아이 엄마’가 25개월 딸이 이웃의 초등 5학년생에게 성폭행당했다고 낸 청원이었다. 쇼킹한 글은 30대 초반인 필자의 가정 설정과 거주지만 사실이고, 이웃집 소년이나 성폭행, 병원진단은 다 가공된 얘기였다. 경범죄보다 중한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5년 이하 징역, 1000만원 이하 벌금)로 입건됐다. 게시판엔 “소름 끼친다” “그나마 다행이다” “이젠 증거 있는 것만 동의하겠다” “엄벌해달라”는 네 갈래 댓글이 이어진다. 왜 그랬을까. 사건이 커지자 경찰에 ‘허위’라고 말한 그는 아직도 거짓 글을 쓴 이유는 밝히지 않고 있다고 한다.
2017년 8월19일 시작된 국민청원엔 하루 700개 안팎의 글이 오른다. 20만명 이상 동의해 공식 답변이 나온 163개 청원 중에 동의자 숫자 1위는 ‘n번방 용의자 신상공개 요구’ 글(271만건)이다. 평택 30대 엄마의 거짓 글은 15위였다. 지난해에도 ‘동거남’과 ‘동생 때린 또래 청소년들’을 처벌해달라는 가짜 청원이 있었지만, 파장은 53만명이 속은 이번 글만 못했다. 국민청원의 버팀목이자 순기능은 직접민주주의 보완과 소통이다. 반대로 자정할 것은 선 넘은 인신공격과 명예훼손, 장난 글이다. 평택 아이 엄마의 거짓 글은 청원이 모두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경각심을 하나 더했다.
<이기수 논설위원 k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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