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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여적]베이징 ‘유리창’

opinionX 2019. 12. 16. 11:08

‘초여름의 날씨가 무더웠다. 나는 매일 수레를 빌려 취영당(聚瀛堂)에 가서 답답함을 풀었다. 갓을 벗고 의자에 앉아 내키는 대로 책을 뽑아 보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때때로 오류거(五柳居)에 들러 도생(陶生·서점 주인)과 이야기했다.’ 1801년 연행 사절로 베이징을 찾은 유득공은 거의 매일 유리창을 찾았다. 취영당·오류거는 그의 발길이 오래 머문 책방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책을 읽거나 중국의 지식인들을 만나 대화했다. 유득공에게 유리창은 책과 지식인을 만나는 ‘문화의 창’이었다. 그는 1790년 1차 연행 때도 유리창을 방문했다. 유득공은 <연대재유록>에 유리창 방문기를 실었는데, 이 글은 뒷날 <유리창 소지(小志)>에 재수록됐다. 

유득공뿐 아니었다. 연행사로 중국에 간 조선의 학자들은 어김없이 유리창을 방문했다. 홍대용은 그곳에서 엄성·반정균을 만나 평생 국경을 초월한 우정을 이어갔다. 이덕무와 박제가는 유리창에서 청나라 서적을 대량 구입했다. 연암 박지원은 그곳에서 <열하일기>의 한 편인 ‘양매시화’를 완성했다. 18~19세기 조선 지식인들에게 유리창은 ‘북학의 성지’이자 ‘지식 교류의 거점’이었다.

유리창(琉璃廠)은 원래 황실에 유리 기와를 제작해 공급하던 공장이 있었던 곳이다. 청나라 건륭제가 사고전서 편찬에 나서자 전국의 서적상들이 몰리면서 서점의 메카가 됐다. 유리창은 전성기 때 규모가 27만칸이었고, 거리가 동서 5리에 달했다고 한다. 오늘날 옛 영화는 사라졌다. 민가가 들어찬 유리창에서 중국서점·영보재·급고각 등이 겨우 옛 문화거리의 명맥을 잇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들 가게는 서점이 아니다. 책보다는 서화첩이나 문방사우, 다구를 주로 판다.

지난주 선인들의 문자향을 기대하며 유리창을 찾았다. 거리는 스산했고, 서화나 문방사우를 파는 가게들은 찾는 이가 없어 썰렁했다. 날씨 탓만은 아니었다. 구불구불한 후퉁에는 제대로 된 안내판조차 없었다. 가게에 진열된 붓, 벼루, 인장 등의 가격은 터무니없이 높았다. 유리창은 베이징시가 내세우는 문화보호구역이자 관광명소다. 그러나 그곳에는 역사도, 문화도 없었다. 연암이 머물렀던 오래된 거리 ‘양매죽사가’를 확인한 게 소득의 전부였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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