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일반 칼럼

[여적]위장수사

opinionX 2020. 4. 24. 11:13

극장을 찾은 시민들이 영화 ‘극한직업’을 소개하는 전광판 아래를 지나가고 있다. 김영민 기자

“지금까지 이런 맛은 없었다. 이것은 갈비인가, 통닭인가.”

관객 1600여만명을 동원한 역대 2위 흥행 영화 <극한직업>에서 마약반 형사들은 치킨집을 차려놓고 잠복수사에 나선다. 신분을 위장해 치킨 장사를 하면서 근처 범죄조직의 아지트를 24시간 감시한다. 잠입수사는 신분을 위장하거나 몰래 숨어들어 정보를 얻는 수사를 말한다. 위장수사라고도 한다. 이런 얘기를 다룬 영화가 많다. <신세계>에서 배우 이정재도 딱 그 역할이었다.

범행 길목을 지키거나 범죄 현장에 숨어드는 위장수사 기법은 마약사범 검거나 성매매·도박 단속 때 쓰인다. 마약 구매자나 성 매수자로 위장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위법과 합법의 경계에 있다. 수사 과정의 적법성에 대한 판단이 다를 수 있어서다. 속임수로 얻은 수사 정보가 증거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국내에서는 명확한 법 규정이나 지침이 없어 위장수사를 표면에 내세우지 못했다. 경우에 따라 유효한 기법으로 권장될 수도 없었다.

그간 판례에 따르면, 범죄 의사가 없는 이를 부추겨 범행에 이르게 한 ‘범의유발형’ 위장수사는 위법으로 판단됐다. 반면 범행 의도가 있는 이에게 여지를 주는 ‘기회제공형’은 적법한 것으로 여겨졌다. 수사관이 속임수로 마약을 건넨 피의자를 검거한 사례는 위법, 제보받은 마약 거래 현장에서 검거한 사례는 적법이었다.

이른바 ‘n번방’ 사건 이후 디지털 성범죄 수사에 위장수사를 허용하자는 목소리가 높았다. 미국·영국·호주 등에서는 정부의 확실한 지침 아래 성범죄 수사에 위장수사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고 했다.

정부가 23일 발표한 디지털 성범죄 대책 중 잠입수사 도입 방침이 눈에 띄었다. 갈수록 은밀해지는 디지털 성범죄물 유통을 적극 탐지·적발하기 위해 수사관이 미성년자 등으로 위장하는 잠입수사를 즉각 실시한다는 것이다. 법률 근거도 마련한다고 했다. 수사당국의 속임수를 공식화한다는 논란의 소지는 있지만, 정부가 디지털 성범죄를 뿌리뽑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으로 디지털 성범죄 수사에서 “지금까지 이런(이렇게 잘한) 수사는 없었다”는 말만 나오면 좋겠다.

<차준철 논설위원 cheol@kyunghyang.com>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