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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예산안 심사가 본격 시작됐다. 언제나 그랬듯 올해도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야당은 공무원 일자리 증원, 최저임금 지원, 사회간접자본(SOC) 삭감 등을 놓고 단단히 벼르고 있다. 이를 일부 언론은 ‘눈먼 나랏돈 새는 것을 막기 위해서 국회 심의가 시작된다’고 썼다.

예산안을 칭할 때 흔히 쓰는 표현이 ‘나랏돈’이다. ‘나랏돈 국민 위해 푼다’, ‘나랏돈 마중물로 일자리 늘린다’, ‘사람 중심 소득주도 성장에 나랏돈 푼다’. 문재인 정부의 429조원짜리 첫 예산이 공개된 지난 8월, 상당수 언론은 예의 ‘나랏돈’이라는 용어를 썼다.

새 정부 예산안을 어떻게 규정해야 할까 꽤 고민했다. 경향신문이 정한 제목은 ‘시민으로부터 받은 세금을 시민에게 되돌려 준다’였다. 예산은 정부가 한 해 동안 쓸 돈이니까 ‘나라살림’이나 ‘나라곳간’은 맞다. 

그런데 예산 자체를 나랏돈이라고 표현하는 데는 어폐가 있다. 나랏돈이라고 하면 국가소유의 돈으로 시민과는 상관없는 돈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정부가 벌어서 시민들에게 베푸는 돈이라면 맞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정부 재정은 경제주체인 개인과 기업이 낸 세금을 모아서 마련된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었을 때 소득세와 법인세를 낸다. 세금을 떼고 남은 돈으로 소비를 하면 부가가치세를 낸다. 그러고도 남은 돈이나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면 증여세나 상속세를 낸다. 집을 사면 취득세와 거래세를, 집을 갖고 있으면 보유세를, 팔 때 차익이 남는다면 양도소득세를 낸다. 이렇게 해서 정부가 내년에 걷어들일 국세 총액이 268조원이다. 시민과 기업이 잘못해 내는 벌금과 과태료 등 국세외수입과 각종 기금수입까지 합치면 내년 447조원의 총수입이 예상된다. 여기에 정부관료가 해외에 나가서 벌어들인 돈은 단 한 푼도 없다. 기업도 시민이 운영하는 것이고 보면 결국 모두가 시민의 돈이다. 정부는 이렇게 모은 돈을 내년에 쓰기로 했다. 그게 예산 429조원이다.

시민들은 429조원을 정부에 상납한 것이 아니다. 그저 위탁했을 뿐이다. 정부는 이 돈을 분배할 권리는 있지만 소유할 권리는 없다. 그래서 나라살림은 맞지만 나랏돈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아버지와 아들, 딸이 벌어온 돈을 어머니에게 맡겼다면 그 돈을 ‘가정살림’으로는 표현할 수 있지만 ‘어머니 돈’으로 볼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시민들이 정부에 돈의 분배권을 주는 이유는 한국사회에 대한 정부의 정보력과 분석력이 개인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 정부는 한국사회 어디에서 돈을 필요로 하는지, 어떻게 쓰면 더 가치가 있을 것인지를 안다고 시민들은 기대한다. 당연히 그 돈은 사사로이 쓰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박근혜 정부가 국가정보원으로부터 특수활동비를 상납받았다는 얘기는 그래서 충격적이다. 특수활동비는 어디에 쓰는지 용처를 묻지 않는다. 시민들은 정부가 밝히기는 어렵지만, 좋은 일에 쓸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 국정원의 주머니에 꽂아줬다. 그런데 그 돈이 ‘문고리 3인방’을 거쳐 대통령의 주머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고 한다. 역대정부에서도 그랬다는 것은 변명이 안된다. 박근혜 정부는 쓸 데가 많다며 담뱃값을 올렸고, 연말정산 세액공제도 도입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도둑부터 줄였어야 했다.

박근혜 정부는 예산을 ‘나랏돈’이 아니라 ‘나라님 돈’으로 생각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예산은 나랏돈이 아니라 시민의 돈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내 돈이다. 누가 대낮 노상에서 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자기 주머니로 ‘인 마이 포켓’을 했다는 데 가만있을 사람은 없다. 나의 분노는 정당하다.

<경제부 | 박병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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