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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기업이 부담되더라도 근로자의 권익 보호를 위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찬성 79.1%, 반대 20.9%) “우리가 다소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은 반드시 보장되어야 한다.”(찬성 82.8%, 반대 17.2%)

어떤 여론조사 결과일까? 놀라지 마시라. 2007년 대선을 앞두고 한겨레가 실시한 국민 이념조사 결과이다. 다른 여론조사와 달리 ‘다소 부담되더라도’ ‘다소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이주노동자 인권 보호를 지지하는지를 물어본 것인데, 우리 국민들 5명 중 4명이 긍정적인 답변을 한 것이다.

10년이 지나 2017년 대선을 앞둔 지금 다시 한번 조사해 본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생업을 잠시 접고 국정농단 세력 단죄에 나서고, 도심 교통체증을 인내하며 광장에 나오는 촛불 민심을 들여다보면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 조심스레 기대해본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하지만 그렇지 않은 대목도 존재한다. 최근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개선과 정규직 전환을 촉진하기 위해 추진되어온 ‘교육공무직법’을 둘러싼 논란이 있었다. 고작 11개 조항과 부칙으로 만들어진 이 법안에 대해 선동적인 반대 의견이 쇄도해 결국 이 법안을 발의한 더불어민주당 측이 사회적 토론을 통한 재추진을 전제로 발의를 취소하기에 이르렀다.

법안 내용의 핵심은 아니었지만 교사 자격증을 소지한 비정규직 노동자를 교사로 채용토록 노력한다는 조항에 대한 취업준비생들의 반대 의견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보다 어렵다는 취업전선에 선 수많은 청년들의 절망은 폭발 직전의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드러난 일부 교사, 공무원들의 반대 의견은 이해하기 어렵다. “시험도 보지 않고 정규직이 되겠다는 거냐?” “예산도 충분치 않은데 가능한 일이냐?”

이런 의견은 그나마 신사적인 수준이다. 업무 자체가 정규직과 다른데 어떻게 동일 처우를 바라느냐, 아는 사람 추천으로 들어온 이도 있는데 모조리 정규직 전환을 해야 하느냐 등 노동과 비정규직을 비하하는 의견들까지 개진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우선 간단한 오해부터 풀고 시작하자. 교육공무직법은 37만여명에 달하는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를 (공무원이 아니라)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처우를 개선하자는 취지이다. 따라서 시험 얘기가 끼어들 이유가 없다. 예산이 충분치 않다? 이 얘기는 오히려 부메랑이 되어 교사, 공무원들의 처우 악화로 이어지는 논리가 되고 말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학교 비정규직 업무의 노동강도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휴가 한 번 쓰기도 어렵고 근골격계 질환도 심각하다. 업무가 정규직 노동과 다르다? 맞다. 훨씬 힘들고 어렵고 기피하고픈 업무들이다. 하루만 일해봐도 처우가 이래선 정말 곤란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더 주자고는 못할망정 처우의 획기적 개선 필요성을 어찌 부정할 수 있겠는가.

교육공무직법이 담고 있는 핵심 내용은 11개밖에 되지 않는 법조항 숫자만큼이나 단순명쾌하다. 우선 상시적인 업무에는 비정규직을 사용하지 말고 정규직으로 직접 고용하라는 것이다. 정부 역시 올해 4월7일 ‘기간제 고용안정 가이드라인’에 이러한 취지를 담은 바 있다. 하지만 이는 법이 아니라 지침에 불과해서 사업장에 적용을 강제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우선 교육현장에서만이라도 이 원칙을 법으로 강제하자는 것이다.

다음으로 ‘근속을 인정한 임금체계’를 도입하라는 것이다. 1년을 일해도, 10년을 일해도, 어제 입사한 노동자와 똑같은 임금을 받는 게 과연 합리적인가? 호봉제나 근속수당 도입 등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교육공무직법은 구체적 방법은 명시하지 않되 임금과 처우에 대해서는 “근속 기간을 고려하여 정하”도록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길게 보면 교육공무직법 제정은 교사와 공무원의 권리를 높이는 계기가 된다.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과정에 교사·공무원들이 함께한다면, 정규직으로 전환된 노동자들은 교사·공무원의 권리 확대를 위한 사업에 연대할 것이다. 교사·공무원과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연대가 성사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교육 현장의 모든 노동자들이 K스포츠재단이나 미르재단 설립 등에 투입되는 예산, 재벌들만 배불리는 정책에 투여되는 예산을 찾아내는 집단적 작업을 시작할 것이다.

쓸데없는 곳에 투입돼 낭비되는 예산을 교육현장에 투입하자는 주장이 자연스럽게 나올 것이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대중운동이 구성된다. 정규직 혼자서, 또는 비정규직 혼자서 운동을 하는 것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공동의 목표를 향해 같이 나선다면 여기에서 뿜어지는 거대한 에너지는 교육 현장에서 일하는 모든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과 권리 보장을 만들어낼 것이다.

2007 이념 지도에 나타난 국민들 의식, 즉 ‘다소 부담되더라도’ ‘다소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정규직 전환이 필요하고 이주노동자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생각의 바탕에도 그런 것이 깔려 있다. 즉, 이러한 시각은 “손해를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식과는 거리가 멀다. 지금 당장은 손해와 불이익처럼 보이지만 길게 보면 나를 포함해 전체 사회 구성원에게 이익으로 작동하게 될 것이라는 영리한 생각이다. 이제 며칠 뒤면 2016년이 끝난다. 2017년의 이념 지도는 어떻게 그려 나가야 할까.

오민규 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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