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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은 신직수 중앙정보부 차장을 검찰총장에 임명했다. 당시 신직수 나이는 서른여섯. 신직수의 고교·대학 동창들은 지방 검찰청 평검사였다. 특히 신직수는 고등고시나 사법시험도 아닌 군 법무관 임용시험 출신이었다. 신직수는 1971년 6월까지 8년 가까이 검찰총장직을 수행하고, 이후 법무부 장관으로 영전했다.

검찰로서는 굴욕적인 얘기지만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 검찰은 중정이나 보안사에 밀렸다. 검찰의 역할이란 각본이 짜여진 수사에 검사 이름을 빌려주거나 재판에 조연으로 출석하는 것이 전부였다. 사실상 존재감이 없었다.

경찰도 겉으로는 굽실거렸지만 검찰을 우습게 봤다. 권인숙 성고문 사건이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 경찰의 천인공노할 범죄 행위에도 검찰은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권인숙씨와 변호인단이 고문 경찰 문귀동을 처벌해달라고 고소하자 검찰은 “허위 사실을 날조해 수사기관의 위신을 실추시키고 정부의 공권력을 무력화하려는 의도”라고 오히려 경찰을 두둔했다.

그런 검찰이 중정과 경찰을 누를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민주화 덕분이다. 1987년 민주화투쟁 이후 공권력 집행에 법적 절차가 중시되고 독재정권 시 자행된 비리 청산 작업이 진행되면서 검찰은 인권 신장과 사회부패 척결에 큰 기여를 했다. 전두환·노태우 등 전직 대통령을 기소해 감옥에 넣었고, 재벌 총수들을 법정에 세웠다. 송광수·안대희 같은 검사는 국민적 스타로 부상했다.

그때가 검찰의 최고 전성기였다. 이후 검찰의 영향력은 더욱 강해졌지만 국민의 지지와 성원은 예전만 못하다. 검찰이 생명과 같은 정치적 중립을 포기하고 정권의 입맛에 맞는 수사를 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발생한 노무현 전 대통령 자살 사건은 검찰의 존재 이유에 근본적인 의심을 품게 했다.

박근혜 정부에서 검찰의 신뢰는 더 떨어졌다. 검찰과 정권은 아예 한몸이 됐다. 검사 출신 정홍원 국무총리와 김기춘 비서실장이 집권 초기 2년 내각과 청와대를 이끌었다. 청와대와 법무부에는 수십 명의 검사들이 파견됐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대선개입 혐의로 기소한 채동욱 검찰총장은 찍혀 나갔고, 이후 바뀐 총장 체제에서 검찰은 청와대를 ‘멘붕’에 빠뜨린 ‘십상시의 난’을 일개 경찰관의 일탈로 간단히 정리했다.

2015년 3월 검찰에 큰 장이 섰다. 공안부와 특수부 검사들이 쌍끌이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우선 검찰은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 피습 사건에 13명의 검사를 투입했다. 일당백·최정예라는 수식어가 붙는 서울중앙지검 공안부·공공형사부 검사들이다. 수사팀장은 차기 대검 공안부장인 중앙지검 2차장이다. 다른 한 축은 옛 대검 중수부 격인 서울중앙지검 특수부 검사들이 총동원됐다.

그러나 검찰 수사는 이미 가이드라인이 정해졌다. 사건 직후 박근혜 대통령은 미 대사 피습사건을 “한·미동맹에 대한 공격”이라고 규정했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배후’를 거론하며 “테러세력을 뿌리 뽑아야 한다”고 했다. 검찰은 피의자 김기종씨의 배후를 밝히는 데 총력을 기울일 것이다.

김씨와 과거에 옷깃이라도 스친 사람, 평소 미국을 비판한 사람은 모조리 수사 대상이다. 진보 진영과 야당 인사들이 타깃이 될 수밖에 없다.

국정원 시국회의, 진보연대, 민변 등 사회단체 회원들이 26일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과 관련해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고발장을 접수하기 위해 검찰청사로 들어가고 있다. (출처 : 경향DB)


특수부 수사는 전임 정권의 실정을 파헤쳐 국정난맥의 책임을 희석시키기 위한 현 정권의 하명 수사나 다름없다. 이완구 총리는 취임 후 첫 대국민담화에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부정부패를 발본색원하겠다”며 방위사업 납품 비리와 해외자원개발 관련 배임 및 부실투자 등을 구체적으로 거론했다.

조만간 검찰청사의 포토라인은 전임 정부 실세들이 장식하고, 오는 4월은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잔인한 달’이 될 것이다. 이 전 대통령 측근인 이재오 의원은 “부패공직자가 부패청산을 외치는 것은 정권유지용 쇼”라고 반발했지만 검찰은 5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죽은 권력의 말은 귀담아 듣지 않는다.

검찰이 칼을 뽑자 정·관계와 재계가 서초동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국민들에게 검찰 수사가 감동과 희망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수사 성공에 필수적인 국민 지지와 성원은 보이지 않는다. ‘올 것이 왔을 뿐’이라는 시큰둥한 반응이 대부분이다.

중립성을 훼손한 검찰의 업보이고, 박근혜 정부의 한계이다. 살아 있는 권력에 봉사하는 ‘권력의 시녀’가 아니라 정권이 바뀌어도 변함없이 정의와 진실을 추구하는 검찰을 보고 싶다.


오창민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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