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전 동계올림픽 개최국으로서 이웃 국가에서 열리는 차기 올림픽에 보이콧 운운해야 하는 것도 서글픈 현실이다. 이렇게 말하면 인권보다 올림픽이 중요하냐는 반론 앞에 시달리게 될 우리 외교관들의 고달픈 얼굴이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북한 인권 문제를 오랫동안 고민해 온 한국에 인권은 실질적 해법을 마련해 주민들에게 실제 혜택이 돌아가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노무현 정부 이래 확립해 온 또 다른 원칙이 분명하다. 인권 외교가 때로는 주권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보호책임론으로 이론화되기도 했고 민주평화론이라는 이름하에 권위주의 체제를 전복하는 선제공격론이 실행되기도 했던 선례도 있지만 그 같은 샤우팅 외교의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하다. 대(對)봉기관리(counterinsurgency)에 실패해 실질적 인권 하락을 초래한 이라크나 시리아, 아프칸 등을 보면 아무리 민주주의 체제라도 인권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진영의 자기 강화나 세력 확장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비인권적이라는 비판 앞에 숙연해진다.
실제 조 바이든 행정부의 제이크 설리번 안보보좌관은 지난 17일 미국외교협회 연설에서 바이든 행정부에 인권은 매우 중요한 가치이지만 그것만이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보는 것은 아니라며, 위구르의 인권 문제 때문에 미국의 선수들이 베이징에서 경쟁해서는 안 된다고 얘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렇게 보면 외교적 보이콧론이 중국 압박에 강조점이 있는 것인지 선수단 참여를 반대하는 국내 여론 극복에 초점이 있는 것인지 그의 답변은 모호하기 그지없다. 속내를 알 수는 없지만 미·중관계에 대한 현상유지론을 견지하고 있는 그의 입장에 비추어 의미를 해석하는 것도 나쁜 방법은 아닌 듯하다.
사실 많은 국내 전문가들이 미국의 외교적 보이콧을 거부하는 것을 우려하는 이유는 ‘2015년 트라우마’ 때문이다. 당시는 미국과 중국이라는 고래 사이에 놓인 한국이 새우가 아니라 돌고래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팽배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한·미·중 3각 대화를 추진하겠다는 공약을 강조하며, 9월3일 중국의 전승기념절 행사에 참여하였다. 이후 미국의 동맹국으로서는 유일하게 참석한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 미국 내에서 제기되기 시작했고, 급기야 10월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국 측은 냉랭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외교 참사로 기억될 정도였다. 한국전 참전국인 중국 측으로부터 사과 한번 받지 못하고 ‘전승 열병식’에 참여한 소감이 어떠냐는 날 선 질문이 쏟아졌다. 그날 이후 한국은 다시 새우가 되었고 한·일위안부 합의, 사드 배치, 지소미아 체결 등 미·일 동맹이 원해온 목록들이 우리 외교의 우선순위로 되는 꼴들을 두 눈 뜨고 지켜봐야 했다.
당시 상황의 데자뷔를 걱정하는 전문가들은 정부가 종전선언 때문에 베이징 올림픽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제기한다. 하지만 종전선언은 베이징 올림픽과 무관하고 북·미협상을 매개하기 위한 마중물이라는 점을 밝힌 마당에, 굳이 종전선언 때문이라는 프레임을 덧씌울 일은 아니다.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전임 개최국이 세계인들 앞에서 평창 평화 프로세스를 상기시키고 15억 인구에게 당당하게 축하를 보낼 기회의 장을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 올림픽이 열병식도 아니고, 평창 전과 후를 동일시할 까닭도 없다. 오히려 2015년과 같은 궤도수정을 피하기 위해 일희일비하지 않는 뱃심을 키울 일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70년, 한민족 해방과 분단 70년을 맞은 지금이 동아시아 관계국의 지도자와 국민들이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평화를 다짐했던 그날을 잊지 않고 … 그것이 곧 아시아인들이 인간 중심의 정치를 세계에 보여줄 첫걸음이 될 것이다.” 2015년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의 방중 결심에 영향을 미친 매우 중요한 칼럼으로 평가받는 이홍구 전 총리의 2015년 8월3일자 중앙일보 칼럼을 다시 읽어본다. 남다른 자존과 유연함으로 우리 통일 외교의 어른으로 남아 계신 이 전 총리의 글에서 중도반단하지 않는 리더십과 결단을 본다.
이정철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