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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시대가 아닌 현대를 살아가는 개인은 신의 ‘율법’ 대신 근대 이성을 통해 획득한 ‘상식’과 ‘양심’에 의지한다. 시민의 양심을 통제하기 위해 과거라면 ‘교회’가 수행했을 역할을 근대국가는 ‘학교’와 ‘언론’에 위임한다. 이때의 양심이란 비록 ‘개인의 내적 판단력’이지만, 그 판단력이란 결국 사회적으로 공유된 가치를 훈육 받고 내재화한 결과다. 그런 의미에서 ‘국정교과서’는 개인의 양심을 국가권력이 좀 더 직접적으로 통제하고 싶다는 욕망의 발현이다. 개인이 양심적이라고 해서 누구나 저항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에 의한 문화통제가 성공적일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가의 통치행위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질 이유도, 여유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 사회의 여러 기구들이 상식적이고, 합리적으로 작동한다고 믿을 수 있는 사회라면 개인은 굳이 스스로 옳다고 믿는 양심을 의심하기 위해 에너지를 들이지 않아도 될 것이다. 종종 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 같은 이유로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스스로를 의심하는 데 들이는 에너지와 비용을 절약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나를 대신할 대표선수를 찾아 위임하는 것이다. 일본의 근대사상가이자 루쉰 연구자였던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는 이것을 ‘우등생 문화’라고 불렀다. 그는 일본이 군국주의화하여 만주침략과 태평양전쟁의 길로 들어선 까닭을 거기에서 찾는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 문화는 우수하다. 우수한 선수들이 구축했으니 우수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우등생들이 우수하다고 말하니 열등생인 인민도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우등생들은 우수한 일본문화에도 우수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사회의 열등생들이다. 우등생만 있다면 일본 문화는 완전할 텐데 열등생이 있어서 그만큼 불완전해지고, 우등생이 아무리 분발해도 열등생이 수준을 깎아내린다. 우등생이 대표선수가 되어 국제경기에서 승리하면 열등생에게도 명예다. 열등생은 우등생을 응원하지 않을 수 없고 응원해야 한다. 그런데 졌다. 왜 졌지? 그들은 생각한다. 열등한 부분이 우수한 부분을 끌어내려서다. 기필코 승리할 우수한 부분이 열등한 부분의 방해 때문에 졌다. 결코 우리의 우수한 부분이 패배한 것이 아니다. 패전의 책임은 열등생에게 있다. 그래서 선수 교체다. 당연히 교체한 선수도 우등생이다. 우등생이 아니면 선수가 될 수 없다.

정치 무관심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한민국 사람들만큼 능력있는 우등생을 열망하는 우등생문화에 젖은 사람들은 찾기 어렵다. 왜냐하면 한국은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 누가 집권여당이 되느냐에 따라 블랙리스트에 올라 생계를 위협받을 수도 있을 만큼 정치가 생존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최순실 게이트와 박근혜 탄핵국면 이후 우리는 대한민국이 배출한 이른바 우등생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적나라하게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핵 이후 찾아오게 될 대통령 선거에서 또다시 나를 대신할 우등생을 찾는다. 그렇게 선발된 우등생 대표는 우리 편이고 그를 조금이라도 비판하면 나쁜 사람이다. 품성론(品性論)과 자격론(資格論)의 반복이다. 그간 우리 정치는 나 아니면 안될 구세주 영웅들의 정치였다. 박근혜 대통령조차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다 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최소한 국민의 절반은 그 말을 믿었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우수한 문화의 열등한 부분이 아니라 바로 그 우수한 부분에서 패배했다고 생각한다면 어떨까?”라며 문제인식의 핵심을 반전시킨다. 그간 우리가 우수한 것이라고 믿어왔던 그 문화 자체를 거부하면 어떠냐고 되묻는 것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냉혹한 일상의 현실은 단지 정권 교체 정도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개인이 착하게 살아가기 위해 지불해야 할 사회적 비용과 에너지가 왜 이렇게 많이 필요한가. 왜? 그건 우리가 열등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등생이라고 믿었던, 우리 사회의 우수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던 자들에게 우리의 상식과 양심을 위임했기 때문이다. 그런 문화의 전복 없이 새로운 세상은 오지 않는다.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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