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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의 1980년대 중반 연작 소설 <저문 날의 삽화 1>의 초반부 장면에서 시작해 보자. 주인공인 60대 여성은 외손자와 외손녀가 조립식 장난감을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는 중이다. 잠시 외할머니 집에 맡겨진 두 꼬마는 잠자리에 들 시간이 한참 지났건만 지친 기색 없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장난감을 만드는 데 열중한다. 박완서는 그 모습을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묘사한다.

“계집애는 오빠 옆에 바싹 붙어 앉아 접착제 튜브를 아껴가며 조금씩 짜주고 있었고 사내 녀석은 가느다란 나무젓가락 끝에 그걸 묻혀서 로켓의 날개를 붙이고 있었다. 계집애는 선망과 찬탄으로, 사내 녀석은 몰입과 자신감으로 둘 다 발가니 상기해 있었고 숨결이 할딱이고 있었다. 로켓은 거의 다 돼가고 있었다. 그때가 조립식 장난감의 전성시대였다.”

화자인 외할머니는 손자 손녀가 장난감을 완성하더니 더 이상 가지고 놀지 않고 그냥 내팽개치는 걸 보고선 의아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딸에게 아이들한테 낭비벽이 생길까 걱정되니 “조립식 장난감 좀 작작 사주어라”고 말한다.

하지만 딸로부터 그 장난감이 “가지고 놀라는 장난감”이 아니라 “만들면서 놀라는 장난감”이라는 설명을 듣고선 조립식 장난감의 유별난 용도를 이해하게 된다.

확실히 조립식 장난감은 밤 9시만 되면 일찍 잠자리에 드는 텔레비전 속 착한 어린이들의 세계와는 다른 곳에 속한 물건이었다. 일단 그것은 아이들로 하여금 조립 과정에 몰입하게 함으로써 과외 금지로 남아도는 시간을 자발적으로 소비하게끔 만들었다. 그런데 이 장난감의 효용이 거기에만 그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조립 과정을 거치면서 아이들과 밀착된 관계를 맺을 뿐만 아니라, 그 관계를 통해 아이들에게 매혹의 대상으로서 독특한 이중구속의 경험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위의 소년이 조금 더 성장해 당시 핫 아이템이었던 아카데미과학의 독일군 하노마크 반궤도 장갑차를 조립하고 있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이 소년은 강렬한 인상의 장갑차 모델에 자연스럽게 매료된다. 이는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보는 이를 압도하는 이 살상용 강철 기계 장치의 공격적 형상은 자동차 정비 공장에서 얼추 조립한 것 같은 미군의 전투 차량이 감히 범접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소년의 애정과 관심이 지나쳐 제2차 세계 대전의 내막을 조금이라도 들여다본다면, 하노마크를 만들어낸 나치 독일이 20세기 절대 악의 본류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소년은 심미적 판단과 도덕적 판단의 이중구속에 걸려들게 된다. 선악에 대한 분별력을 과시하기 위해 나치의 전쟁 기계가 안겨주는 진기한 시각적 쾌감을 거부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고통스럽더라도 죄의식을 감내하면서 디자인에 대한 호불호를 분명히 표명해야 할 것인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

결국 소년은 이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나름의 해법을 찾아낸다. 그것은 심미적 판단과 도덕적 판단이 각각 다른 차원에 속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정의의 사도라고 무조건 멋진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악의 화신도 아름다울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위치로 옮겨가는 것이다. 달리 말해 이중구속의 상황 자체를 일종의 아이러니로 즐기는 것이다.

종종 이런 태도는 ‘단일한 자아’에 대한 거부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니까 도덕적 판단과 심미적 판단의 주체가 반드시 ‘동일한 나’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다음, 각각의 차원에 최적화된 형태로 자아를 쪼개고 새롭게 조형해내는 것이다. 마치 변신합체 로봇이 괴수 로봇의 파상적인 공격에 대처하기 위해 자신의 기계 몸을 다섯 마리의 사자 로봇으로 분리하듯이 말이다. 이렇게 복수의 자아들을 거느리게 된 소년, 이제 그는 이중구속의 상황에 처할 때마다 그 자아들 중 하나를 작동시켜 거기서 유유히 빠져나온다. 그만큼 삐딱하게 어른들의 세계에 가까워진 것이었다.

박해천 동양대 교수 디자인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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