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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12일 토요일이었다. 인천 연수경찰서에 전화가 걸려왔다. 오전 11시4분이었다. “여섯 살 정도 돼 보이는 아이가 맨발로 혼자 돌아다니고 있다.” 인천 연수동에 위치한 동네슈퍼 주인의 제보였다. 경찰이 발견한 “아이”는 키 120㎝와 몸무게 16㎏, 짧은 머리와 반바지 차림에 맨발의 왜소한 소녀였다. 경찰 발표와 취재 보도가 잇따랐다. 2년간 집에 감금되어 굶주림과 폭행에 시달린 소녀는 뒤로 묶인 양손의 노끈을 풀고 2층 세탁실 창문을 나와 가스배관을 타고 탈출했으며 배가 고파 동네슈퍼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소녀의 이야기는 그렇게 세상에 알려졌다.

맨발의 소녀가 등장하는 동네슈퍼의 CCTV 화면은 공포 영화였다. 넋 나간 소녀는 곧장 먹을 것을 찾아 가슴에 안고는 위태롭게 걸었다. 주인이 바닥에 박스를 깔아주자 그 위에 간신히 무릎 꿇고는 야윈 손으로 포장지를 뜯고 힘겹게 입에 넣기 시작했다. “집이 어디냐”는 질문에 “고아원”이라고 답했던 소녀는 병원으로 옮긴 뒤 “집에 안 보낼게”라는 말을 듣고서야 그간 당한 학대를 털어놓았다. 6세로 오인됐던 소녀는 11세였고 부천에서 2학년 1학기까지 초등학교를 다니다 인천으로 이사온 다음 집에 감금되었다.

부친, 동거녀, 동거녀 친구, 애완견 두 마리와 함께 지냈으나 완전히 고립된 소녀는 갈비뼈 골절과 온갖 타박상과 영양 결핍을 작은 몸으로 견디다 그날 오전 그렇게 탈출했다. 이 사건의 충격은 친부의 아동 학대만이 아니었다. 진짜 충격은 소녀가 2년간 사라졌는데도 학교와 동사무소 누구도 행적을 몰랐다는 행정 공백이었다. 소녀를 신고한 동네슈퍼 주인을 비롯해 누구도 소녀를 알지 못했다는 이웃 관계의 절벽이었다. 이 사건으로 정부는 장기 결석 아동을 조사했고 그 결과 친부모의 아동 학대 살인 사건만 현재 세 건이 드러났다.

조사할수록 아동 학대와 실종 사건은 늘 것이다. 장애인과 노인 등 사회적 약자로 조사를 넓히면 사건은 대폭 증가할 것이다. 요컨대 11세 소녀의 이야기는 혈연 가족의 파탄사가 아니다. 국가와 공동체의 안전망이 무너진 상태에서 가족에게 전가된 아동의 운명이 그간 어찌 방치되고 은폐되었는지를 폭로하며 국가와 공동체를 고발한 사건이다. 부친 처벌을 원한다고 밝힌 소녀에게 검경 전담반은 더 많은 처벌을 발표하겠지만 그래서 학대가 줄어들까. “걱정하지 말고 낳기만” 하면 육아를 책임진다던 국가가 약속을 저버린 상황에서 응답은 지구촌 최하위 출산율이다.

정부는 5년간 200조원을 투입해 출산율을 높인다는 종합대책을 내놓지만, 아동과 청소년의 안전을 믿는 국민이 8명 중 1명에 불과한 사회에서 문제는 출산율이 아니다. ‘아동수출국’의 오명과 고아원 아동 증가에다 중증 질환 아동의 치료비를 TV 국민성금으로 때우는 나라에서 “걱정하지 말고 낳기만” 하라니. 63만5000쌍의 불임 부부 중 정부 지원은 연평균 7.5%인 현실에서 “낳기만” 하라니, 이 무대책에 대한 하소연이 출산 포기다.

여기에 출산장려금을 늘리고 출산율이 높은 지자체에 인센티브를 준다는 정부의 발상은 아전인수다. 1월29일 당정협의 자리에 참석한 경제 4단체 대표들의 발언은 더하다. 저출산 극복을 위해 ‘노동개혁’과 ‘노동유연성’을 강화해서 기업에 부담은 줄이고 혜택은 늘리라는 딴청이다. 누리과정 보육대란, 높은 사교육비와 대학등록금, 취업난과 주거난까지 사방을 지뢰밭으로 만들어놓고 11세 소녀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이 학대 부모 처벌뿐이라면 너무 뻔뻔하다. 가슴이 먹먹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진 시청자들이 소녀에게 성금을 보내는 것 말고는 없단 말인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밝혔듯 성인의 97.5%가 정부의 저출산 대책을 효과 없다고 느낀다면 종합대책은 전면 혁신되어야 한다. 혁신은 갖은 방법과 수단을 열거하고 거창한 구호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원점에서 다시 정의할 때 시작된다. 이렇게 재정의하면 문제는 아동이 태어나서 자라기에 나쁜 사회 자체다. 해법은 아동이 태어나서 자라기에 좋은 사회로 도시를 바꾸는 것이다. 그런 도시라야 부모는 물론 장애인, 노인에게도 좋은 사회를 만든다. 작년 9월15일 아동친화도시 지방정부추진협의회가 출범했다. 유네스코와 함께하는 협의회에는 27개 지자체가 참여했다.

아동친화도시란 무엇인가. 미혼모라서 혼자 낳고 엄마라서 혼자 기르고 가족이라서 자녀를 도맡는 도시가 아니다. 정부와 학교와 마을이 함께 사회적 양육에 나서는 아동친화를 도시 가치의 첫째로 꼽는 사회다. 11세 소녀에게 절실한 터전은 이런 도시다. 이런 도시라면 저출산 문제의 매듭도 풀린다. 5년간 200조원의 종합대책을 이렇게 혁신한다면 앞서 열거한 많은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아동 학대의 반대말은 자녀 사랑이 아니라 도시에 사는 우리 모두의 아동친화다.


김종휘 |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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