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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긴 해도 만지거나 잡을 수 없는 것이 그림자다. 느낌이 들긴 해도 보거나 알 수 없는 것이 유령이다. 그림자와 유령이 배회하는 세계에서는 정체불명과 실체 없음의 풍문이 지배한다. 불과 두 해 전이었다. 세월호의 침몰을 똑똑히 보았지만 그 원인과 책임은 그림자처럼 잡을 수 없었다. 한 해 전이었다. 메르스의 공포에 지독히 떨었지만 그 경로와 전모는 유령처럼 볼 수 없었다. 이렇듯 우리는 무엇이 가상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는 가상현실의 수상한 세월을 살고 있다.
두 달 열흘 남긴 선거가 그렇다. 교과서, 위안부, 핵, 사드, 누리과정, 청년수당 등 역사의 기억과 공동체의 안전 그리고 삶의 수준은 한없이 누추해졌다. 이런 사태를 해결하고 공동체의 운명과 우리 아이의 미래를 밝혀야 할 선거는 “그림자와 유령의 싸움”이 되어 있다. 이 말은 작년에 개봉한 <분노의 질주 7>에 나온 대사다. 영화는 카레이서 주인공들의 활극으로 관객의 눈길을 붙잡지만 싸움의 구도는 “그림자와 유령”이 기획한다. 신출귀몰하는 전직 암살 특수부대원은 사적 복수의 괴력을 발휘하고, 신원 모를 정부조직의 최고 책임자는 전지전능한 권력을 행사한다. 이 싸움에서 엑스트라 군상은 속속 죽어나간다.
이번 선거에서 “그림자와 유령”은 무엇일까. 51 대 49의 여야 기반이 콘크리트라는 전제, 야당 분열은 곧 필패라는 구도, 지역과 세대 대결 및 투표율이 변수라는 상식이다. “그림자와 유령”이 연출한 선거에서 언론이 제공하는 화제는 카레이서 출마자들의 활극이다.
이어 승자 독식의 전국지도 색칠이 끝나면 언론은 투표 결과의 배경을 국민의 정치 환멸로 단정한다. 그럼 우리는 ‘일상으로 복귀’해서 엑스트라 유권자의 그 권리가 선거에서 얼마나 속절없는지 한탄하다가 언론이 불러준 대로 행인 1과 2의 정치 환멸이라는 대사를 보잘것없이 읊조리고 퇴장한다.
20대 총선의 나에게 다_경향DB
“그림자와 유령”의 선거 각본은 이렇게 반복되면서 유권자의 그 유권(有權), “권리 있음”이 사전적 정의와 다르다는 것을, 즉 ‘국민에게 권리와 권력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누락시킨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와 제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담대한 선언은 4, 5년에 하루뿐인 선거인 투표로 이체된다.
그러나 4, 5년씩 누적된 환멸의 몸이 단 하루의 투표로 희망의 마음을 되살릴 수는 없다. 해서 선거철마다 “그림자와 유령의 싸움”은 할리우드를 뺨치는 저들만의 활극이 된다.
그 기획을 “그림자와 유령”한테서 찾아오길 원한다면 국민이 직접 기획해야 한다. 4, 5년에 한 번이 아니라 매년, 매월, 매주 참여하고 결정하고 투표하기를 거듭할 때 국민 주권을 국민 기획으로 실현하는 길이 열린다. 단언컨대 그 출발은 대통령과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을 내 손으로 뽑는 것만이 아니라, 아니 그것에 선행해서 내가 사는 우리 동네의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투표하는 일상의 행동이다. 이 점에서 서울시가 작년부터 시작한 ‘찾아가는 동 복지’ 정책은 헌법 제1조 제1항과 제2항에 화답하는 정직한 발상이다.
이 정책의 초점은 동사무소를 마을센터로 만드는 민관 협치에 있다. 작년엔 서울시 4개 구가 했다. 성북구는 월곡2동과 길음1동이 했다. 올해엔 서울시 17개 구에서 하고 계속 늘어날 추세다. 무엇을 하는가. 동 단위로 전 세대에 안내문을 보내고 자발적 추천으로 마을계획단을 꾸린다. 이들은 동사무소를 카페나 도서관처럼 사용하면서 마을 조사를 하고 3인 이상이면 제출할 수 있는 마을계획을 모집한다. 그 후 추첨과 숙의 민주제를 결합한 총회를 열고 투표한다. 결정된 마을계획은 예산 배정과 함께 실행에 들어간다.
주민 기획과 주민 주권을 실천하는 이런 담대한 도전은 시행착오를 겪을 것이고 성패를 말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하나 이런 노력이 없다면 인구절벽, 재정절벽, 고용절벽에 처한 이 땅에서 더는 정의와 자유의 민주주의를 논하기 어렵다. 주민 주권의 뿌리를 살려 시민과 국민의 주권을 강화하는 하방주권(下方主權)의 흐름이 만들어지면 국가의 대의 민주주의도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경제도 이제는 중앙의 국가와 재벌에서 지역과 마을로 하방해야 성장할 수 있다.
하방주권과 하방성장은 “그림자와 유령의 싸움”판에 행인 1과 2이기를 멈추고 국민 스스로 국민 주권이라는 행복을 기획하는 길이다. 예의 영화에서 “그림자와 유령”은 “신의 눈”이라는 해킹 프로그램을 독차지하려고 싸운다. 휴대폰과 CCTV와 위성을 연결해서 순식간에 표적을 찾는 “신의 눈”은 그러나 프로그램이기 전에 우리 동네의 친밀한 이웃 관계를 기획하는 ‘근린 협치’여야 한다. 맞은편 집에 수저가 몇 개고 아이는 누구며 어디가 아픈지 알고 지내는 동네에서는 “그림자와 유령”이 발붙일 데가 없다. 안전을 바란다면 마을 만들기를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종휘 |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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