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남아프리카의 가톨릭 신부이자 학자인 앨버트 놀란이 쓴 <기독교 이전의 예수>라는 매우 흥미로운 책이 있다. 이 책의 주안점은 기독교 성립 이전의 상황, 즉 로마제국의 변방 식민지였던 팔레스티나에 살던 한 인간을 “진지하고 정직하게 그리고 동시대인의 눈을 통해서” 묘사하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책에서 독자들이 보는 것은 메시아, 구원자, 삼위일체의 신(神) 등등 기독교 신앙이 전제된 예수상이 아니라 가난한 식민지 땅에서 이웃들과 나날의 슬픔과 기쁨을 함께하면서 살았던 ‘목수의 아들’의 실존적 삶과 그 내면이다.


앨버트 놀란의 문제의식은, 태생으로 보나 교육으로 보나 중류계급 출신이며 삶의 조건이 별로 불리하지 않았던 예수가 “하층민 중에서도 최하층 사람들과 어울려 사귀고 또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즉, 예수는 왜 스스로 버림받은 자들과 함께 있기를 ‘선택’했던가? 이에 대한 간명한 답변은, 예수가 엄청난 연민의 인간이었다는 점이다. 연민이란 타자의 고통에 대한 심정적 반응이다. 예수가 목자 없는 양들처럼 풀이 죽어있는 자들을 딱하게 여기고, 과부를 위로하고, 나병환자와 소경을 낫게 하고,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측은하게 여겼다는 이야기들은 실제로 복음서에서도 가장 살아있는 구체적 증언들이다. 그러나 앨버트 놀란은 연민, 자비심, 동정심 같은 말로 예수의 진실한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영어판(혹은 한글판) 성서의 ‘측은히 여긴다’라는 표현은 그리스어 ‘스플랑크니소마이’를 번역한 말인데, 이 말은 원래 ‘애간장이 탄다, 창자가 끊어진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즉, 고통받고 핍박받는 사람들을 대하는 예수의 마음은 단순한 동정심 정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렘브란트 반 레인,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출처 :경향DB)

타인의 운명 혹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라는 점에서 예수의 이야기와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는 대표적인 사례는 아마도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경우일 것이다. 알다시피 트루먼은 루스벨트의 급작스러운 병사(病死)로 졸지에 부통령에서 대통령의 자리에 올라 태평양전쟁 말기 미국 군대의 최종 지휘권자가 되었던 인물이다. 되돌아보면, 트루먼의 역할은 현대사와 인류문명의 전개 방향에 결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맨해튼계획의 ‘성과’인 원자폭탄의 실제 사용 여부가 그의 판단에 달려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 투하를 명령했고, 그 결과 미증유의 대참사를 일으키고, 또한 이른바 ‘핵시대’를 열어놓음으로써 지금까지도 인류사회가 핵의 공포와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퇴임 후 75회째 생일날 그는 어떤 하객으로부터 “생애 중 후회스러운 일이 없었는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후회되는 게 있다면 결혼을 더 일찍 못한 것”이라고 답변했다. 요컨대, 원폭 투하 결정이라는 것은 그의 생애에서 매우 사소한 사건이었고, 자신의 결정으로 참혹하게 희생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 생각은 그의 머릿속에 전혀 들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인데 어째 저럴 수 있을까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트루먼식의 반응은 실제로 인간사회에서 드문 것이 아니다. 이른바 잘난 사람, 출세하고 성공한 사람들, 권력자들일수록 타인의 고통과 불운에 대한 무관심 내지 둔감성은 유별나다고 할 수 있다. 오죽하면 부자가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더 어렵다고 했겠는가.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지만, 후쿠시마 사태로 인해 집과 삶터를 잃고 수많은 사람들이 방황을 하고 심지어 자살자까지 늘어나는 상황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원전 사고 수습이 전혀 진척이 안 되고 있는 상황에서 원자력을 단념하기는커녕 계속적인 원전 가동, 원전 수출 정책을 말하고 있는 일본정부와 권력자들의 행태는 가증스럽다기보다 불가사의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물론 일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밀양에서 초고압 송전탑 건설문제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시골 사람들을 대하는 이 나라 기득권자, 잘난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거의 구역질이 난다. 그들은 “이대로만 살게 내버려 둬 달라”는 시골 사람들의 간절한 호소에 한번이라도 귀를 기울일 마음은 없이, 시골 사람들의 무지와 이기심을 비난하는 데만 열을 올린다. 심지어 최근에는 ‘외부세력’ 운운하더니 드디어 ‘종북세력’을 들먹이는 데까지 왔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3년 10월9일 (출처 :경향DB)


이 지겹도록 반복되는 약자멸시와 강자우선의 논리, 즉 자신들의 특권적 이익을 ‘국익’으로 포장하여 끊임없이 약자를 희생시킴으로써 기득권을 유지·강화하려는 이 뿌리 깊은 부도덕한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수 있을까? 나는 저명한 반핵운동가 히로세 다카시의 오래된 제안, 즉 원전을 세우려면 도쿄 중심부에 세워야 한다는 제안을 그냥 반어법이 아니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결국 대개의 인간은 당사자가 아니면 당사자의 고통과 불행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울이나 대도시의 전력 사용 때문에 시골 사람들이 고통과 멸시를 당하는 상황을 종식시키자면, 대도시 사람들도 같은 고통을 느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원전과 전쟁은 약자의 희생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러므로 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책도 전쟁이 나면 사회적 약자만이 아니라 전쟁을 일으킨 권력자 자신이 먼저 희생되도록 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미 20세기 초에 이런 제안을 한 사람이 있었다. 덴마크의 육군대장 프리츠 홀름은 ‘전쟁근절법안’을 만들어 각국 지도자들에게 돌렸는데, 그 법안의 개요는 이러했다. 즉 “전쟁 개시 후 10시간 내에 다음 각항에 해당하는 자들은 최하급 병졸로 소집되어 최전선에 배치되어야 한다. 1. 국가원수 및 그 친족 2. 총리 및 장차관 3. 국회의원(단, 전쟁에 반대한 국회의원은 제외) 4. 전쟁에 반대하지 않은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위에 열거한 자들의 아내, 딸, 자매 등은 간호사 혹은 잡역부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야전병원에 근무해야 한다.” (이 이야기는 1920년대 일본의 반전평화사상가이자 언론인이었던 하세가와 뇨제칸의 책에 소개된 내용이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