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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미래가 있을까? 우리에게 정말 희망이 있는가? 연일 ‘내란음모’니 뭐니 하며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뉴스쇼’들을 보고 있자니 괴롭다기보다 한심하다는 생각만 든다. 하기는 현역 국회의원이 ‘내란음모’에 연루되었다니 재판 결과가 어떻게 되든 혐의 사실만으로도 충격적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 혐의를 뒷받침하고, 인신 구속의 근거로 제시된 증거물, 즉 소위 ‘녹취록’을 읽어보면 이게 코미디도 아니고 대체 뭔가 하는 허망한 생각이 절로 든다. 장난감 총을 개조해서 뭘 어떻게 한다는 것인지, 통신시설과 유류탱크를 어떻게 공격해서 뭘 하자는 것인지, 혹시 이 방면의 전문가들은 짐작하는 게 있는지 모르지만, 우리처럼 어리석은 백성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잡히는 게 없다. 당사자들한테는 실례 되는 말이겠지만, 이른바 ‘주사파’에 속한 활동가나 정치인들의 지적·정신적 능력이 이 정도인 줄은 정말 몰랐다.


국가권력도 한심하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벌써 수년 전부터 사찰을 시작해 획득한 증거라는 게 겨우 이 코미디보다 못한 ‘녹취록’인가? 막대한 세금을 써서 움직이는 국가정보기관이 이 정도밖에 실력이 없다면, 그것도 물론 작은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을 둘러싼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소동 속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붙잡고 씨름해야 할 보다 긴급하고, 절실한 과제들에 대한 정치적·사회적 의식이 위축되고, 심지어 증발해 버린다는 점이다. ‘내란음모’가 있고, ‘간첩죄’에 해당하는 범죄행위가 있다면, 그때그때 법적 절차에 따라 적발하고, 심판하면 되는 것이다. 정말로 시민들의 신뢰를 받는 국가기관이 되고 싶다면, 정치적 목적을 위해 공안사건을 조작하거나 활용했던 군사독재 시대를 연상시키는 행동은 하지 않는 게 마땅하고, 그게 주권자인 국민에 대한 도리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애국행위’는 오히려 망국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음을 냉정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법정 들어서는 이석기 의원 (출처: 경향DB)

그러나 누구보다 냉정히 자신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언론기관들이다. 요 며칠 주류 미디어가 보여주는 모습은, 보도매체라기보다 오랜만에 먹이를 발견한 굶주린 승냥이를 방불케 한다. 누군가 이미 지적했지만,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다. ‘내란음모’라는 무시무시한 사건을 다루는데, 왜 그토록 신이 날까(이 과잉 흥분 상태의 원인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지만, 나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이 ‘정열’의 1만분의 1만이라도 때늦지 않게 4대강 공사나 원자력 문제의 진실을 캐는 데에 바쳐졌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부질없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언론들이 냉정을 잃으면 공정성과 객관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한없이 천박해진다는 것도 이번에 나는 새삼 깨달았다. 그런 점에서 엊그제 언론인 손석희씨가 뉴스앵커로 재등장하게 된 것을 계기로 행한 어느 인터뷰에서, 뉴스의 객관성·공정성 못지않게 ‘품위’의 중요성을 거론한 것은 퍽 인상적이었다).


항용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주류 언론의 공격 대상은 사건 당사자들만이 아니다. 지금 가장 황당한 것은 이 사건을 빌미로 우리 사회에서 이른바 좌파 혹은 진보 진영 전체가 존명을 유지하기 어려울 만큼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태가 이렇게 된 것은 물론 좌파 혹은 진보 진영 자신의 잘못도 크지만, 기본적으로는 주류 언론에 의한 끊임없는 비방과 공격의 결과라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출처: 경향DB)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좌우 이데올로기의 구분을 갈수록 무의미하게 만들고 있는 세계이다. 이런 현실이기 때문에 더욱, 당면한 인류사적 위기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지난 수세기 동안 인류사회 속에 축적되어온 다양한 사상과 경험과 기술을 포괄적으로 지혜롭게 계승하면서 어려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힘을 얻어야 한다. 이것은 극히 초보적인 상식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좌우의 이념·사상은 대립을 통한 상호 승인과 대화가 계속돼야 할 관계이지, 한쪽이 다른 쪽을 섬멸해야 할 불구대천의 관계는 결코 아니다.


‘내란음모’ 사태 속에서 또다시 좌파들에 대한 적대감을 퍼뜨리는 데 분주한 주류 언론들의 기세등등한 태도를 보면서 문득 물어보고 싶어졌다. “그래 다 좋다. 그런데 그대들은 무슨 대책이 있는가? 정말로 이 체제가 그대로 계속돼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자본주의 시장지상주의 논리가 정말 정답이라고 믿는가? 노동자들의 인권이나 사회적 불평등, 환경파괴, 자원고갈 따위는 어찌 되든 끝없이 투기를 장려하고, 값싼 제품의 더 많은 생산, 유통, 소비, 폐기를 일념으로 추구해가면, 언젠가는 골치 아픈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된다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빠른 속도로 닥치고 있는 기후변화의 위협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죽어버린 행성(dead planet)’ 위에서는 모든 게 끝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지난 6월 뉴욕의 페이스대학교에서 ‘개혁과 혁명을 위한 2013년 좌파 포럼’이 열렸다. 미국과 캐나다를 포함한 세계 전역의 ‘좌파 지식인·활동가’들이 참석하여 사흘 동안 열린 이 모임에서는 300편이 넘는 논문이 발표되고, 촘스키를 비롯한 석학들의 강연이 있었다. 포럼의 총괄적 테마는 ‘생태적·경제적 전환을 위해서’였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동안 생태위기는 일반적으로 ‘좌파’에 의해 기피되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인식되어온 문제이다. 그런데 이 대규모 좌파 지식인들의 포럼은 이제 그런 시대는 끝났다는 것을 명확히 선언했다. 인터넷에서 지금 확인할 수 있는 발표 논문들의 제목과 요약문을 일별해 보더라도, 이제는 세계의 지식인들이 생태적 위기상황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이번 포럼에서 ‘세계체제론’의 이론가 월러스틴은 앞으로 수십년 사이에 세상이 연옥이 되느냐 아니면 지금보다 조금 더 인간적인 사회로 가느냐가 결정될 것이며, 그 확률은 50 대 50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제 가짜 싸움은 시급히 그만두고 진짜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싸움에 좌파, 우파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제라도 늦게나마, 사심을 버리고,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정말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지 눈을 뜰 필요가 있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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