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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들 틈에 사는 것 같아요.” 지인으로부터 들은 말이다. 그는 요즘 지인을 만날 때마다 덜컥 겁부터 난단다. 과거에 멀쩡했던 사람들이 ‘조국’에 관해 뭔가 부정적인 얘기라도 하면 대화 중 갑자기 괴물로 돌변해 공격해오는 일을 몇 차례 겪었기 때문이다. 좀 전까지 다정히 대화를 나누던 친구나 동료가 바로 눈앞에서 좀비로 돌변하는 상황. 이게 어디 그만의 일이겠는가? 요즘 그와 비슷하게 느끼는 사람이 많을 게다. 

요즘 이 사회에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있다. 이야기가 ‘조국’과 그의 가족에 이르면 성한 정신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가끔 제정신 가진 이를 만나면, 마치 영화 속에서 좀비에 쫓기던 주인공이 용케 살아남은 다른 인간 생존자들을 만난 것처럼 반갑다. 그 반가움은 거의 생물학적인 것이어서, 호모사피엔스가 야생에서 우연히 같은 종을 만났을 때 느끼는 종적(種的) 유대감, 유적(類的) 안도감에 가깝다. 

정상인이라면 ‘부모가 학생의 시험을 대신 치르는 것이 명백한 부정행위’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좀비 바이러스는 이성을 마비시킨다. 감염자의 첫 증상은 헛소리. “그것은 대리시험이 아니라 오픈 북이었다.”(유시민 이사장) 따라서 그것을 문제 삼는 것은 “대한민국 우리 어머니들, 부모님들의 절반 이상을 잘못하면 범죄 혐의로 몰 수 있다”(홍익표 대변인). 교수의 뇌라고 해서 바이러스 앞에서 무사한 것은 아니다. 

“온라인 시험을 부모한테 물어 답한다고 부정행위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온라인 시험은 여기저기 책을 구해 읽어보거나 아는 사람을 찾아다니며 답을 구하는 능력입니다. 조국 아들은 요행히 자기 가까이에 유능한 사람을 두어 쉽게 온라인 시험에 활용했을 뿐입니다. 요즈음 같은 무한경쟁시대는 바로 그런 온라인 시험의 능력이 진짜 필요한 시대입니다.” 

이분은 감염되기 전에 무려 마르크스 경제학을 전공했단다. 결국 ‘부모 잘 만나는 것이야말로 디지털시대에 반드시 갖춰야 할 능력’이라는 얘기인데,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 아닌가? “돈 많은 부모 만나는 것도 능력”이라던 정유라의 항변을 생각해 보라. 결국 문재인 정권이 그동안 열심히 추진해온 그 개혁이라는 것의 정체가, 고작 최순실 가문이 차지하던 자리를 조국 가문에게 넘겨주는 것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높으신 양반들이 깔아놓은 자락 위에서 무명의 민초들도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도 아이가 문제 푸는 거 도와주곤 하는데, 그럼 나도 고소당하겠네.” 민초들이라 그런지 비위를 옹호하는 방식이 매우 토착적이며 생활 밀착적이다. “조카가 사생대회 그림 그리는 거 도와준 적 있는데, 나도 고소하지 그래?” 한 번이라도 아이의 숙제를 거들어 본 모든 이들이 들고일어나 ‘나를 고소하라!’며 집단으로 항의를 한다. 무슨 드레퓌스 사건이라도 일어난 줄 알았다. 

‘시험은 부모가 아니라 학생이 치르는 것이다.’ 얼마 전만 해도 이는 상식에 속했다. 하지만 이제 당연함의 당연함을 주장하기 위해 매번 좀비들과 논쟁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아예 논리의 영역을 떠나버린 이들이라, 애초에 이길 수도 없는 논쟁이다. 결국 ‘자식의 시험을 부모가 대신 치르는 것은 부정’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조지워싱턴대학의 도움을 빌려야만 했다. 나라 안에서 논리와 윤리의 기준이 무너진 터라, 그 기준을 밖에서 빌려와야 할 신세가 된 셈이다. 

여당의 홍익표 대변인은 “조지워싱턴대 성적사정 업무방해죄를 기술했는데 이게 얼마나 조국 장관 기소 내용을 희화화시킬지를 전혀 고려하지 못한 것 같다”며, 기소 검사를 “검찰의 X맨”이라 불렀다. 이렇게 그는 심각한 시험부정을 가볍게 ‘희화화’한다. 시험부정 따위는 이들에게는 아예 범죄도 아닌 모양이다. 참고로, 쌍둥이 딸에게 답안지 넘겨주었던 어느 교무부장은 법원에서 징역 3년의 실형을 언도받은 바 있다. 

아무리 혐의를 드러내도 지지자들의 믿음을 바꿔놓을 수는 없다. 그들은 그저 이렇게 말할 뿐이다. “그렇게 털었는데 나온 게 이것밖에 없어? 조국 장관님은 정말 깨끗하시다!” 시험부정의 사실이 외려 청렴함의 징표가 된다. 아들을 대신해 시험을 치른 조국 전 장관이 정유라의 대리과제 기사에 “경악한다”며 코멘트를 달아도, 그들은 결코 경악하지 않는다. 

한때 지구상에 네안데르탈인과 호모사피엔스가 공존했듯이 이 사회에도 당분간 두 종류의 영장류가 공존할 모양이다. 좀비들 틈에서 숨죽이며 살아가는 모든 생존자들에게 새해인사를 보낸다. ‘올해도 무사하세요. 우리 멸종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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