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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문화와 삶

위로의 풍경

opinionX 2017. 5. 25. 11:03

사춘기를 겪은 기억이 거의 없다. 반항아도 아니었고 매사에 순종하는 아이도 아니었다. 그 무렵, 음악에 빠져 들기 시작하면서 돌부리 같은 감정들을 음악으로 해소했다. 이유도 없이 분노가 치솟고 우울이 가득한 나이에 새로운 음악을 들으면 이유도 없이 마음은 잔잔해졌다. 헤비메탈을 들으며 스트레스를 부수고, 프로그레시브 록을 들으며 심미안이란 걸 싹틔웠다. 주로 해외 음악을 들었으니 가사보다는 소리 그 자체를 통해 내면의 감정들과 교류했다. 그러니 세상과 부딪힐 일도 없었다. 아니, 부딪혀도 부딪힌 줄 모르고 예민한 시기를 지나왔다는 게 맞을 것이다. 새장 속에 갇혀 있던 그 시절, 음악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위로하고 달래주는 존재였다고 세월이 흐르고서야 생각하곤 한다.

새장 밖으로 나와 시작한 대학 생활의 첫걸음은 혼돈 그 자체였다. 주어진 목표란 게 사라지고, 밤마다 퍼마신 술은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면모를 꺼내는 촉매제였다. 방황이란 게 시작됐다. 뭐, 대단한 건 아니었다. 그 전까지 여자랑은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못해보고 살다가 인간관계에 다른 성별을 가진 사람들이 대거 추가된 거다. 교통사고처럼 갑작스레 찾아온 짝사랑 말이다. 난생처음 맞게 된 호르몬의 폭풍 앞에서 나는 너무나 미숙했다. 마치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자마자 F1 레이스에 참가한 심경이었다. 어떤 음악을 들어도 그 감정에는 포개지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손발이 오글거리는 걸 참다 못해 과거로 돌아가 그때의 나에게 호된 참교육을 하고 싶어질 정도다. 상대에 대한 전략도, 배려도 없이 혼자 좌충우돌하다가 결국 대놓고 거절을 당한 날, 선배에게 상담을 청했다. 둘 다 취해 있었다. 선배는 뭐라 뭐라 말해줬지만 마음이 달래지지 않았다. 이미 그때부터 연애의 달인 기질이 있었던 동기와의 대화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그들에게 구한 것은 위로와 격려였을 테지만 어쨌든 스무 살 언저리의 미숙한 남자들끼리 ‘말발’을 세워봤자 무슨 효과가 있었겠나.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37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추모사를 하다 눈물을 흘린 한 유가족을 위로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그런 나날이 이어지던 중, 여자 선배 한 명을 믿고 따르게 됐다. 버드나무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던 5월의 캠퍼스, 우리는 벤치에 앉아 자판기에서 100원짜리 커피를 뽑아 대화를 나눴다. 상담을 빙자한 횡설수설이었다. 누나 또한 나보다 한두 살 많은 연배에 불과했지만 죽비 같은 한마디를 건넸다. “답은 네가 알고 있잖아. 누가 무슨 말을 해줘도 넌 네가 알고 있는 답을 그대로 듣고 싶은 거 아니야? 그러면서 후련해하고 싶은 거 아니야?” 발가벗겨진 듯한 기분이었다. 말로 하는 위로란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스무 살의 나는 깨달았다. 그 후로 한 살 한 살씩 먹어가며 위로의 무용함을 가슴에 담고 살았다. 친구나 후배들이 힘든 상황을 털어놓으면 나는 위로의 언어 대신 그 누나와 비슷한 말을 해줬다. ‘멘토’와 ‘힐링’ 같은 단어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게 되면서부터는 더더욱 위로란 걸 믿지 않게 됐다.

5·18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식, 울먹이며 편지를 낭독한 유가족 김소형씨를 문재인 대통령은 예정에 없이 무대에 올라가 포옹했다. 전에 느껴본 적 없는 큰 울림이었다. 마침내 다시 울려 퍼진 ‘님을 위한 행진곡’의 장중함을 능가했다. 씻김굿의 절정에 다름아니었다. 단지 광주의 영령과 유가족들뿐 아니라, 지난 9년간 민주주의의 퇴행에 괴로워했던 이들, 세월호 참사 이후 일종의 트라우마를 겪었던 이들의 마음까지 안아주는 듯했다. 그들에게 ‘힘내’라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말해줬을까. 그래봤자 힘이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들이 있었고 이는 제도로 규정되었다. 하지만 근원적 슬픔이 해결되지 않았기에 김소형씨는 통곡하듯 편지를 읽었을 것이다. 제도란 언어로 구성되고 만들어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제도는 역시 현실을 재구성하고 규정한다. 그 언어적 현실만으로는 닿지 못하는, 마음속 깊은 곳을 대통령은 포옹으로 보듬었다. 그간 믿지 않았던 본질적 ‘위로’였다. 어린 시절, 나를 엇나가지 않게, 우울하지 않게 해줬던 음악이 바로 그랬을 것이다. 누가 기대했을까. 국가 행사에서 이런 장면을 보는 날이 올 거라고. 이런 감정을 느끼는 순간이 있을 거라고. 적어도 나는 몰랐다.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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