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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본질적으로 산문에 속하기에 소설의 문장들은 산문정신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산문정신이란 대상에 대한 철저하고 구체적이며 사실적인 접근 태도를 뜻하는데 굳이 비교하자면 한 편의 시는 사랑을 가리켜 ‘그것은 하나의 사태였다’라고 간결하게 보여줄 수 있으나 한 편의 소설은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나 서로에게 이끌렸고 어떤 방식으로 감정을 드러내거나 감추면서 서로를 밀어내는 동시에 끌어당겼는지와 같은 감정과 행동의 사소하고 세부적인 결들을 섬세하게 포착해 보여주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이런 차이 탓에 소설의 문장들에 대한 오해가 생기는 것 같다. 좋은 소설 문장이란 산문정신에 얼마나 근접했는가로 판단할 수 있다는, 불필요한 수사와 어리석은 말장난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느냐로 판단할 수 있다는 오해 말이다.

이 오해가 오해인 이유는 앞서 설명한 산문정신을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만 받아들여서다. 대상에 대한 철저하고 구체적이며 사실적인 접근 태도와 그런 태도가 바탕이 되어 태어난 문장이 반드시 표면적으로 일치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직함을 표현하기 위해 정직한 단어만을 고를 필요가 없듯이 말이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정직함을 표현하기 위해 정직한 언어만을 구사하려 한다면 아모스 오즈의 소설에서 만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문장 “너무 못생겨서 아름답기까지 하다”와 같은 삶의 언어를 구사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게 되어버릴 것이다. 다시 말해 때로는 슬픔에 눈이 부실 수도 있고 기쁨에 절망할 수도 있으며 행복 탓에 불행할 수도 있는, 삶의 도처에 존재하는 아이러니를 똑바로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오해가 풀렸다고 해서 소설 문장의 정수에 다가갈 수 있는 건 아니다. 반드시 해결해야 할 오해 혹은 용납해야 할 모순이 하나 더 있다. 기이하게도 아름다운 한 편의 시는 예외 없이 자신의 내부에 수많은 사연들을 품고 있어서 독자는 결국 아름다운 한 편의 시를 읽었을 뿐인데도 아름다운 한 편의 소설을 읽은 것과 비슷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반대로 아름다운 한 편의 소설은 아무리 길고 긴 장편소설이라 해도 예외 없이 시와 같은 한 줄의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으며 길고 긴 독서 끝에 남는 건 거대한 하나의 이미지다.

그러므로 문장의 정수는 어느 한 기법이나 기교에 있지 않다. 문장의 정수는 시이거나 소설이거나 상관없이, 시적인 정신을 드러내려는 시도이거나 산문적인 정신을 드러내려는 시도이거나 무관하게, 시가 소설이 되고 소설이 시가 된다는 이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가능하다고 믿는 데에서 시작되고 완성된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도 “미움 때문에 다툴 일도 많지만, 사랑 때문에 다툴 일은 더 많지”라는 식의 무수한 말장난이 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 문장의 아름다움을 인정한다면 결국 문장의 정수가 말장난이냐 아니냐를 구별하는 기준에 있지 않다는 것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말장난이어도 괜찮다. 말장난이어서 문제인 것은 아니다. 얼마나 진지하게 말장난을 했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말장난의 최대치에 이르기 위해 얼마나 용기를 냈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장 주네의 소설 <도둑일기>의 한 문장인 “스페인 그리고 그곳에서의 나의 비렁뱅이 생활은 호화로운 비천함이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다”에서 ‘호화로운 비천함’은 초보적인 말장난 같은 형용모순에 불과하지만 ‘호화롭다’에도 속하지 않고 ‘비천하다’에도 속하지 않는 낯선 이미지를 느낄 수 있듯이, 비천함이 비천함으로만 머물지 않고 어떤 호화로움보다 호화로울 수도 있다는, 가난하고 억압받고 소외당한 이들이 매순간 느껴야 하는 비천함이 그들을 가난하게 만들고 억압하고 소외시킨 이들이 누리는 호화로움보다 정의롭고 순수하고 아름답다는, 이 불가능해 보이던 의미의 비약이 이루어진 순간에 언뜻 드러나는 것이 바로 문장의 정수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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