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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경향시선

유령들

opinionX 2017. 11. 13. 11:42

커튼 뒤에 숨어 있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다

비좁은 장롱 속에 들어가는 것은

더없이 쉬운 일이다

이불 밑에 납작하게 누워 있어도

피아노의자 아래 네 발로 기어들어가

새끼 고슴도치로 웅크려 있어도

금세 웃음소리를 찾아낼 수 있다

발코니 구석에서 은빛 물방울이 되고

유리창에 달라붙은 햇빛이 되고

발가락까지 오그린 투명한 숨소리가 되는 아이들

그렇게 아무리 숨어 있어도

가면을 몇 개씩 찾아 쓰고 있어도

얘들아 이 집에서만큼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단다

물풀 같은 하얀 종아리가 다 자라고 나면

굳이 숨으려 하지 않아도

이 세상은 너희들을 사라지게 할 거야

보이지 않게 만들 거야

다른 그 무엇이 될 수 없게 서류 속에 집어넣을 거야

그때까지만이라도 숨은 그림을 그려야지

유령과 싸워야지 커튼 뒤에서 장롱 속에서

 - 김태형(1970~ )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술래가 되어 어디 있는지 모르게 사라지는 즐거움. 그러다 갑자기 몸을 입고 나타나 사람들 놀래어 주는 즐거움. 숨고 싶은 마음과 들키고 싶은 마음 사이에 술래잡기의 재미가 있는 것 같다. 숨는 즐거움보다 들키는 즐거움이 더 크지 않을까. 들키는 순간의 놀람과 희열, 들킬까 봐 조마조마하던 긴장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을 맛보고 싶어 유령도 되어 보고 투명인간도 되어보는 것 아닐까. 그러나 시인은 아이가 어른이 되어 겪을 슬픈 술래잡기를 예감한다. ‘나’라는 고유한 존재는 없어지고 명함이나 서류에 이름으로만 존재할 때, 있어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될 때, 그래서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술래 ‘나’를 찾아야 할 때, 그것은 놀이가 아니라 두려움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정신이 없을 그때,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셰익스피어, <리어왕>)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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