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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믿을 건 나이다. 자네 몇 살인가. 들어도 답이 얼른 나가지 않는다. 나무는 해마다 한 마디씩 새 가지를 묵은 가지 끝에 정확하게 올려놓는다. 나무의 나이테처럼 사람의 나이도 분명한 숫자가 있을 터인데 대부분 그냥 눙치고 산다. 어려서는 왠지 올리려 하고, 늙어서는 자꾸 깎으려고 하는 게 버릇이 되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연 나이, 만 나이, 한국 나이, 생물학적 나이 등 종류도 많아서 대강 얼버무리기 일쑤다.

올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한국인이 있었다. 두 분은 인터뷰에서 음악과 수학의 조화를 이루는 대위법처럼 아주 비슷한 소감을 남겼다. 우승했다고 실력이 갑자기 느는 것도 아니죠(임윤찬, 피아니스트). 상을 받았다고 문제가 잘 풀리는 것도 아닌데요, 뭘(허준이, 수학자). 세상에 우뚝한 성취와 열광을 덤덤하게 처리하고, 또 가야 할 길의 이정표를 정확하게 세우는 젊은 영웅. 앞으로 더 정진하겠다는 뜻을 저렇게 표현하는 것을 보고 저 젊음의 나이와 연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이가 무색하게 어떤 무심의 경지에서 나오는 말을 들으며 그 나이 때의 나와 지금의 내 나이가 삐끗, 교차하였던 것이다.

“여름 장이란 애시당초에 글러서, 해는 아직 중천에 있건만 장판은 벌써 쓸쓸하고 더운 햇발이 벌여놓은 전 휘장 밑으로 등줄기를 훅훅 볶는다”로 시작하는 <메밀꽃 필 무렵>은 쉬이 잊힐 리가 없는 명단편이다. 나이에 따라 다른 독후감을 얻는 소설에서 올해 새삼 마음을 때리는 문장 하나가 있다. “허생원은 숨이 차 몇 번이고 다리를 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고개를 넘을 때마다 나이가 알렸다.” 일생을 하루로 요약한다면 지금의 내 나이는 ‘춥춥스럽게 날아드는 파리떼’를 쫓아내며 허생원이 드팀전을 거둘 때쯤일까. 이제 웬만한 모임에서 나보다 나이 많은 이도 드물더라. 지하철에서 내려 숨차게 오를 때 계단의 수는 모두 내 나이 아래더라.

또 한 해가 저물어 계묘년이 온다. 토끼에게 큰 귀가 있다면 사람에겐 나이라는 길쭉한 귀가 있다. 아라비아 사막보다 훨씬 더 먼 곳에서 찾아오는 숫자. 탑처럼 쌓이는 줄 알았는데 고드름처럼 자란다. 지하로 가는 길을 뚫을 때 쓰라고 누가 지혜의 뿔처럼 달아주는 것일까. 아무튼 나이, 어렵다.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연재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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