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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규제라는 말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선진국은 다 자율규제를 한다는 것이다. 그건 아마도 신자유주의가 세계적 조류가 되고, 또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국제통화기금(IMF)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한국 사회가 세계 시장에 급속도로 편입되면서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것이 아닌가 싶다. 이 말을 신봉하는 이들의 마음속에는 정부 규제나 강제력을 동원한 규제는 악한 것이라는 신념이 자리 잡고 있는 모양이다. 

규제가 무엇인지, 강제력을 수반하지 않는 규제가 과연 쓸모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논의가 있고 학문적으로도 오랜 논쟁거리라서 쉽게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논쟁에 참여하는 이들은 모두, 뭔가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에 맞는 최적의 수단으로, 경직된 정부 규제 일변도의 틀보다 더 좋은 규제를 찾아야 한다는 욕구를 공통분모로 갖고 있다. 공동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자기지배의 전통은 약하고 아래로부터의 자율규제 경험은 일천하다. 

근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스스로를 규율하는 훈련보다는 빠르고 강력한 규제와 그 규제 회피를 역량으로 여기는 문화가 여전하다. 현대 한국 역사에서 흘린 피에 비하면 얻은 것이 너무 적다. 우리 스스로 들여다보고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된 자기지배의 전통을 함께 만들어야 한다. 맹목적 자율규제나 외세의 압박에 이용만 당하는 자율규제는 곤란하다.

인터넷으로 방향을 돌리면 자율규제를 향한 그간의 노력이 더 잘 보인다. 1990년대부터 본격화한 인터넷 혁명은 급기야 한국을 세계적인 디지털 전환 선도국가로 만들었지만 일천한 경험 속에서 자율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극명하게 깨닫게 한 것도 사실이다. 게임셧다운제, 인터넷실명제 등 실패한 과잉규제를 경험한 것은 물론, 플랫폼 독과점과 소비자, 근로자 및 소상공인을 벼랑으로 내모는 약탈적 디지털자본이 상호경쟁을 하는 디지털 헬조선을 모든 구성원이 경험하고 있다. 디지털 혁명이 드러내는 혁신 성과와 더불어 투명한 데이터가 뚜렷하게 우리 사회와 삶을 설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큰 공동체와 미래세대의 삶의 가치는 누군가에게 떠넘기고 눈앞의 이익에 탐욕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현실이 규제전쟁의 출발점이다.

윤석열 정부에서는 디지털 플랫폼 자율규제 정책을 국정기조로 천명하고 판을 열었다. 자율규제를 위한 협의체를 지난여름 발족하여 분과별로 제대로 논의를 해 보자는 의욕이 넘친다. 그런 와중에 가을에 데이터센터 화재로 카카오 먹통사태가 일어나자 난데없이 플랫폼 독과점이 의제로 떠오르고 국민 생활 불편 해소를 내세워 정보기관의 사이버보안 규제론도 고개를 들었다. 윤석열 정부에서 정책기조로 세운 플랫폼 자율규제가 사건과 사태를 맞아 각 부처의 규제권한 다툼으로 좌초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런 위기가 닥치자 자율규제협의체의 당사자라 할 수 있는 플랫폼서비스기업이나 소비자단체 등 시민사회 그리고 학계 전문가 등이 한목소리로 카카오 사태를 빌미로 삼은 자율규제 후퇴에 단호한 반대의견을 내고 있다. 자율규제 정책이 새로운 전기를 맞는 분위기다. 

그렇지만 자율규제협의체에서도 난항은 여전하다. 자율규제에 대한 불신이 모든 참여자를 옥죄고 있다. 플랫폼사업자는 자율규제를 통해 조금이라도 이득을 보길 원하고 정부나 국회의 강한 정부 규제 입법을 무력화하거나 늦추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다. 소비자단체를 중심으로 하는 시민사회단체는 이참에 소비자 이익을 극대화하면서 플랫폼기업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기를 원한다. 정부는 개별 부처의 권한 확대를 위하여 규제권한과 근거를 법제화하는 데 내부경쟁은 물론 국회 등을 대상으로 하는 입법경쟁도 치열하다. 모두 상대를 인정하기보다 자신을 중심에 두고 상대를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삼는 모양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협의체에 참여하는 이들의 권한도 불분명하다. 실제 플랫폼서비스 자율규제협의체 이익의 귀속 주체는 플랫폼 혁신자본가이거나 플랫폼 참여 사업자로서의 입점업체 그리고 이용자인 소비자가 핵심이다. 정부는 공익으로서의 산업 및 사회 질서 유지와 공동체 번영과 같은 후생을 책임지는 종합관리자다. 그런데 협의체에 참여하는 이들은 대부분 핵심 책임자의 대리인에 불과한 데다 그 대리인의 권한도 범위가 불명확하다. 이들이 협의를 통해 합의한 것이 실제 효력을 발휘할 것인지 서로 의심하다보니 협의체가 이른바 ‘간 보는 모임’이 될 수밖에 없다. 자칫 참여하는 분들이 한국에서 자율규제는 불가능하다는 패배주의에 빠질까 걱정될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협의체에 참여하는 이들은 평생 이 문제를 다루어 온 분들이고, 가장 비용효과적인 방법이고 실효성도 확보할 수 있는 일이 자율규제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이분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참여주체를 상호 신뢰하는 일이고 그에 걸맞은 합의권한을 갖는 일이다. 이 두 가지 전제가 충족된다면 우리가 제대로 된 선진국 시민의 결사체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최근에 소비자단체와 플랫폼서비스기업이 소비자를 위한 정보 제공 의무를 확대하는 데 의견을 모아가고 있다. 소비자 피해를 줄이고 플랫폼쇼핑으로 확산되는 위험을 사전에 차단하는 일은 빠른 정보 공유로부터 출발한다. 플랫폼사업자 측에서도 개별 기업의 이익보다 자율규제 성공모델을 만드는 일이 더 큰 이익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소비자단체 측에서도 한 번에 너무 욕심을 내는 것보다 작은 일이라도 함께 성공하는 계기가 필요하다는 데 힘을 모아 가고 있다. 이 일을 지켜보면서 학계 전문가들도 작은 희망을 갖기 시작했고 비판보다 응원의 목소리를 이어가고 있다. 

이 일이 성공한다면 데이터에 기반한 플랫폼서비스 이용자 보호가 시작되고 국민 신뢰를 확보하는 기회가 된다. 또한 자발적이고 자생적인 규율체계를 만들어본 경험은 우리 공동체에 더없이 좋은 자산이 될 것이다. 말로 하는, 개념으로 존재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경험으로 쌓은 민주주의가 힘이 센 것처럼 작은 훈련부터 다져진 자율규제의 모델은 디지털 한국을 더 나은 세상으로 이끌어줄 것이다. 믿고 응원하고 힘을 실어주시길!

<권헌영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

 

 

연재 | 권헌영의 사람과 디지털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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