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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이라고 해서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는 게 아니라서, 문득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혀 고개를 들고 창문을 바라보는 순간, 어떤 물체가 유리창에 부딪혀 아래로 떨어지는 느낌이 있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방금 읽다만 소설 속의 일일까, 잠시 헷갈릴 정도였다.

2층 사무실 베란다로 얼른 내려갔다. 어이쿠, 내 짐작이 맞았다. 화분들 사이에 미동도 않고 가만히 있는 건 한 마리의 작은 새였다. 주먹만 한 새는 추락하는 동안에도 정신줄을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다한 듯했다. 다행히 그 와중에도 두 다리로 몸뚱이를 버티며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뇌진탕인가. 한쪽 발도 심하게 뒤틀려 있었다. 뭔가 안타까운 일이 벌어진 게 틀림없었다.

불길한 징조가 하나 더 있었다. 바닥에 닿아 있는 새의 꼬리였다. 새가 전깃줄에 앉아 있다고 하는 건 틀린 말이다. 새는 앉는 법이 없다. 새는 날 때도 서서 날고, 앉아서도 서 있다. 가령 등산하다 말고 바위에 엉덩이를 내려놓으면 누가 얼른 내 무게를 가져간다. 그래야 비로소 편히 쉴 수 있다. 하지만 새는 한시도 제 무게를 맡기는 법이 없다. 항상 제 몫은 제가 감당하겠다는 듯 두 다리 위에 몸통을 얹어 놓는다. 꼬리는 든 채.

작은 새한테로 조심스레 접근했다. 무언가 해 주고 싶다는 얄팍한 생각이 순간 들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나의 손이야말로 더럽고 오염된 것, 새에게 오히려 치명적인 2차 가해가 될지도 모를 일. 그저 가만히 지켜보는 게 최선이었다. 마음속으로 힘껏 응원을 보냈지만 새는 박제라도 된 것처럼 꼼짝도 아니했다. 한결 꼿꼿한 자세로 깃털 같은 희망을 던져줄 뿐이었다. 아, 미세한 전기가 새의 둘레에 흐르는가. 새가 눈의 조리개를 몇 번 닫고 열었다. 우리가 큰일을 앞두고 어금니를 꽉 깨물 듯, 새는 부리도 몇 번 마주쳤다. 아아, 거대한 그 어떤 것과의 힘든 싸움에서 작은 새는 마침내 혼자 힘으로 이긴 것이다!

새가 서서히 목을 좌우로 돌리기 시작하였다. 쿵, 유리창에 부딪혀 기절했던 순간으로 되돌아가 다시 정신을 이어붙이며 주위 상황을 살폈다. 확, 형광등에 불빛이 들어오듯 생명의 파동을 몸통에서 꼬리까지 흘려보낸 작은 새가 휙, 공중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연재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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