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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 서강대 교수·정치학


이건 포기다. 그렇다. 민주통합당이 대선을 포기한 것이 확실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19대 총선에서 예상 밖의 참패를 하고도 뼈를 깎는 반성과 쇄신은커녕 더욱 오만과 나락 속으로 빠져들 수는 없는 일이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민주통합당이 충격적인 패배 후에도 국민에게 반성하고 혁신하는 척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쇼’조차 왜 하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2004년 총선, 대통령 탄핵으로 역풍이 불어 한나라당은 개헌저지선도 차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그러나 박근혜 의원이 구원투수로 등장해 ‘천막당사’라는 배수진을 통해 예상 밖으로 121석을 건져냈다. 이번 총선에서도 “탄핵 때보다 더 어려울 수 있다”는 일부의 우려 속에서 한나라당은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해 박 의원을 위원장으로 추대했다. 또 박 위원장은 김종인·이상돈 같은 개혁적 인사들을 영입했고 이들은 혁신을 주도했다. 하다못해 당의 색깔까지 그들이 그토록 싫어하던 빨간색으로 바꾸는 쇼를 감행했다.


이해찬 전 총리와 박지원 최고위원 (경향신문DB)


그러나 민주통합당은 참패 후에도 ‘쇄신의 쇼’조차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한명숙 대표가 물러나기는 했지만 문성근 대표대행이 자신의 패배를 비우호적인 언론환경 탓으로 돌리며 부산 젊은이들이 <나꼼수>를 안 들어서 졌다는 식으로 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 기껏 한다는 것은 패배의 원인에 대한 심도 있고 냉철한 분석이 아니라 “좌클릭해서 졌으니 중도로 가야 한다”는 황당한 중도논쟁이었다. 


물론 선거에서 중도를 잡아야 이기는 것은 맞다. 그러나 중도층, 즉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의 지지자가 아닌 무당파층이 민주통합당에 등을 돌린 것은 민주통합당이 비리 전과자를 공천하고 김용민 파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등, 노회찬 당선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새누리당이 뼈를 깎고 있을 때 민주개혁진영은 때나 밀고 있는” 오만한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줬기 때문이지 좌클릭했기 때문이 아니다. 즉 이념이 아니라 상식의 싸움에서 졌다. 사실 총선 과정에서 민주통합당이 좌클릭한 정책들을 국민들에게 선전하고 설득하려 노력한 적이 얼마나 되는가?


며칠 전 아침에 일어나 신문을 보다가 “당이 또 구태 보이면 자멸할 수밖에 없다”는 큰 제목 아래 “민생 얘기는 어디로 가고 온통 정쟁이냐”는 쓴소리를 했다는 기사가 눈에 띄었다. 당연히 민주통합당 이야기라고 생각해 반가워 읽어 봤더니, 박 위원장이 새누리당에 쇄신을 촉구한 내용이었다. 대신 민주통합당은 대표적인 구시대 정치인들인 이해찬 상임고문과 박지원 의원이 각각 당대표와 원내대표를 하기로 밀실담합을 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쇄신을 해도 모자랄 판에 밀실담합이라니 제정신인가? 절망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민주통합당의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로 깨끗한 원칙주의자라는 이미지의 정치 초년생인 문재인 당선자까지 이에 대해 “담합이 아닌 단합으로 오히려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말했다는 데에서는 정말 할 말을 잃게 된다. 나는 이 지면에 쓴 2월27일자의 ‘문재인의 운명’에서 문 당선자가 “대권까지 흙탕물에서의 이전투구를 이겨내기에는 너무 깨끗하고 권력의지가 약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표명한 바 있다. 그러나 이는 말 그대로 기우였던 것 같다. 문제의 논평을 읽고, 문 당선자가 너무 빠르게 원칙을 버리고 이전투구에 적응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미스터리는 민주통합당의 두 지도자가 밀실담합을 하면서, 나아가 문 당선자가 이 담합에 대해 논평을 하면서,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국민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를 생각해 봤을까 하는 점이다. 생각하지 않았다면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것이고, 생각하고도 그런 짓을 했다면 착각도 보통 착각을 한 것이 아니다. 이들 때문에 민주통합당은 국민들에게 민주세력이 통합한 민주통합당이 아니라 호남과 친노의 맹주들이 담합한 ‘맹주담합당’으로 보이게 됐다. 맹주 담합이니 그래도 ‘박근혜 일당체제’보다는 민주적이라고 박수라도 쳐줘야 하나? 맹주담합당, 만만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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