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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후변화가 기후위기를 넘어 이제는 기후재앙 단계라고 열을 올리자, 가만히 듣고 있던 친구가 <퍼스트 리폼드>라는 영화를 보았느냐고 물었다. 제목부터 생소하다고 했더니 친구가 줄거리를 일러줬다. 미국의 젊은 환경운동가 부부가 2세 출산을 놓고 갈등하는 이야기라는 것이었다. 임신한 아내는 아이를 낳고 싶어 하지만 심각한 지구 온난화를 염려하는 행동주의자 남편은 아이를 낳지 말자고 한다. 아내는 평소 존경하는 목사를 찾아가 남편을 설득해달라고 부탁한다.

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인터넷에서 영화를 찾아보았다. 결국 남편은 자살하고, 남편을 잃은 아내를 도와 고인의 유품을 정리하던 목사는 서서히 변화한다. 목사는 교회가 환경을 오염시키는 대기업과 결탁하는 것을 목격하고 환경운동가 남편이 생전에 만들다 그만둔 폭탄조끼를 완성한다.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을 포기해선 안된다’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 같았다. 

친구는 내게 <퍼스트 리폼드>를 추천하면서 “그러다가 우울증에 걸린다. 조심해라”라고 덧붙였다. 흰소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나만의 문제도 아니다. 급격한 지구온난화로 인한 ‘묵시록적 사건’이 각종 미디어를 통해 연일 알려지면서 기후위기가 우리 내면으로 진입한 것이다. 하지만 뜨거워지는 지구 앞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대응은 극히 제한적이다. 지인들과의 대화도 쉽지 않다. 6차 대멸종이 다가온다는 이야기를 꺼내면 대부분 외면한다. 여의도와 청와대를 바로잡는 게 더 시급하다며, 먹고사는 문제가 더 절박하다며 귀 기울이지 않는다. 이웃은 물론 기업과 국가 또한 기후 문제를 최우선 순위로 올리지 않는다. 이런 사태가 쌓이고 쌓여 내면을 위축시킨다.

기후로 인한 무기력증은 어린아이와 눈을 맞추지 못하게 하고 청년들에게 미래의 꿈이 뭐냐고 묻는 것을 주저하게 만든다. 먼저 산 사람으로서 자녀세대에게 ‘온전한 천지자연’을 물려줄 수 없게 됐다는 자책감이 어깨를 짓누르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우울증의 문턱에서 서성거리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주 내가 몸담고 있는 대학에서 기후행동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정부를 비롯해 우리 사회 전반을 향해 ‘우리의 행동이 우리의 미래’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데 동참했다. (이런 표현을 쓰기가 민망하지만) 지식인(교수) 사회가 이른바 ‘조국사태’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와중에 지구 차원의 이슈를 제기한 동료 교수들이 남달라 보였다.

기후행동 성명서에 서명하기 이전부터 내 무기력증을 달래준 또 다른 ‘희망의 증거’가 있다. 기성세대, 특히 정치인들을 향해 ‘우리의 미래를 돌려달라’며 등교를 거부해온 스웨덴의 여고생 그레타 툰베리다. 툰베리의 외로운 싸움은 한 해가 지난 지금 전 세계 청소년과 시민사회로 확산되고 있다. 지난 9월21일부터 일주일간 펼쳐지는 국제기후파업도 그 연장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유엔본부가 있는 미국 뉴욕을 비롯, 전 세계 청년 400만명이 ‘우리 집(지구)이 불타고 있다’며 기후 재앙에 적극 대응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주말 국내에서도 서울을 비롯해 경기 수원, 충남 천안, 대구, 경남 창원 등지에서 학생과 시민이 모여 기후 비상사태를 선언하라고 촉구했다. 오는 27일에도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 청소년들이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면 우리가 나설 것’이라며 시위를 벌일 예정이다.

전 세계에서 전개되는 미래세대와 시민사회의 연대 소식과 더불어 며칠 전 지구를 살릴 수 있는 ‘놀랄 만한 방법’을 접하고 무기력증에서 한 걸음 또 벗어났다. 놀랍게도 대마(大麻)를 심으면 지구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마약의 대명사로 알려진 금기 식물이 온실가스를 흡수한다는 것이다. ‘녹색평론’ 이번 호(9-10월호)에 따르면, 전 세계적인 식림(나무 심기) 프로젝트가 인간 활동에 의한 온실가스의 3분의 2를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이 수치가 굉장히 놀라운 수준이라고 평가한다. 그런데 일반 나무는 성장 속도가 더디다. 미국의 변호사이자 저술가인 엘렌 브라운은 ‘중독성 없는 대마’가 좋은 대안이라고 강조한다. 100일 만에 4m까지 자라는 대마가 가장 빠른 속도로 이산화탄소를 바이오매스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대마는 장점이 많다. 일반 나무와 달리 농경지에서도 키울 수 있고, 다른 작물의 성장에도 도움을 준다. 대마는 연료로 쓰일 뿐만 아니라 플라스틱, 직물, 제지용 펄프, 건설자재 등 많은 부문에서 석유화학 물질을 대체할 수 있다. 그런데 이토록 유익한 식물이 왜 ‘블랙리스트’에 오른 것일까. 1930년대 미국에서 대마가 불법화된 것은 목재, 목화, 석유화학, 제약, 신문 산업 등이 자신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대마를 추방했다는 것이다. 브라운은 대마의 유익한 측면은 결코 새로운 뉴스가 아니라며, 새로운 뉴스가 있다면 미국에서 대마 재배가 최근 합법화됐다는 사실이라고 말한다(‘녹색평론’ 9-10월호 101~107쪽).

툰베리로 대표되는 ‘행동하는 미래세대’와 함께 ‘중독성 없는 대마 심기’가 지구 전체로 퍼져나갔으면 한다. 대마 재배가 미래세대에게 미래를 물려줄 수 있는 ‘가장 값싼 방법’ 중의 하나라니! 우리가 정신 차리고 살펴보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소환해야 할 ‘오래된 미래’가 얼마든지 있지 않겠는가. 친구여, 나는 기후 우울증에 걸리지 않을 테니 염려 마시라.

<이문재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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