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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대선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의 교육 공약 가운데 기억나는 것이 있는가? 대부분 ‘없다’고 답할 것이다. 무엇보다 뾰족한 대학 개혁안이 나오지 못했는데(발표된 공약은 ‘대학원’ 개혁안에 가까웠다), 이는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관계자들을 수평적으로 모아놓은 탓이다. 또한 학부모들이 보편적으로 공감할 만한 정책이 나오지 못했는데, 이는 교육정책단위 구성원 가운데 50·60대 남성이 75%나 된 탓이다.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서 ‘아이 교육은 엄마 몫’으로 치부되지 않았던가? 여성의 비율이 75%였다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진보와 보수는 사교육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 진보는 사교육의 원인이 ‘서열화’에 있다고 보고, 대학 서열을 완화·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수는 사교육의 원인이 ‘공교육 부실’에 있다고 보고, 공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가 보기엔 양쪽 다 맞다. 2016년 마크로밀 엠브레인에서 서울·경기 지역 초등학생 엄마들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 ‘사교육을 하지 않으면 공교육을 따라잡기 어렵다’는 문항에 65.9%가 ‘그렇다’고 답했다. 경쟁에서 이기는 게 아니라 단순히 공교육을 ‘따라가기’조차 어려운 것이다. 통계청 사교육비 조사에서 ‘사교육 이용 목적’을 묻는 질문에는 뭐라 답했을까? 대학 서열로 인한 사교육과 공교육 부실로 인한 사교육의 비율이 동등했다. 가장 최근인 2016년 조사의 경우 ‘경쟁적 사교육’이 76.3%, ‘보완적 사교육’이 76.8%로 거의 똑같았다(복수응답 허용·전자는 ‘선행학습’ 및 ‘진학준비’, 후자는 ‘학교수업 보충’이라고 답한 비율).

이렇듯 엄마들은 진보와 보수의 진단에 모두 동의한다. 대학 서열뿐만 아니라 공교육 자체의 부실함도 절절히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교육이 부실한 것은 교사 책임인가? 그렇다. 하지만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는 ‘나머지 공부’라는 아름다운 전통이 있었다. 학습부진이 우려되는 학생들을 교사가 방과후에 남겨 지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를 하교시키라는 학부모의 민원 앞에, 방과후학교에 자리를 내주고 마땅한 공간을 구하지 못하는 교사들 앞에, 관료와 관리자들은 보신주의로 일관해왔다.

정치권은 학급당 교사를 2명으로 늘리겠다는 가성비가 의문스러운 방안을 놓고 몇 년째 논의만 하고 있다. 이보다 더 시급한 일은 어떻게든 나머지 공부를 유지하느라 고군분투하는 소수의 교사들을 ‘멸종 위기’에서 구해내는 것이다.

또한 우리에게는 ‘숙제’라고 하는 중요한 전통이 있다. 학습(學習)이라는 말 자체가 수업(學)만으로는 되지 않고 익힘(習)도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핀란드에는 숙제도 없고 수준별 교육도 없다’는 미신을 퍼뜨리면서, 숙제를 줄이거나 없앨 것을 종용한 진보 교육계 인사들이 있다. 실상은 핀란드에서 엄연히 초등 1학년부터 숙제가 주어지며, 의무교육 9년 중에 나머지 공부(보완교육 특별반)의 혜택을 경험하는 비율이 30%에 달하고, 고등학교 졸업자 가운데 직업교육 이수 비율이 55%(2018년·성인 재교육 제외)에 달해 수준별 교육의 기능을 분담한다. 직업계고 재학생이 18%에 불과한 한국의 경우, 일반고에 수준별 수업은 꼭 필요하다. 나는 수준별 수업을 부활시킬 진보 교육감 후보들이 나오기를 고대한다.

엄마들은 알고 있다. 아이가 형편없는 수학 점수를 계속 받아오거나 방학만 지나면 영어를 다 까먹는 게 뻔히 보여도 공교육은 별다른 대책을 세워주지 않는다는 것을. 교사들은 알고 있다. 적극적 교육활동을 억압하는 ‘자연선택’의 압력 속에서 마음을 다치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국민들은 알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학력 양극화 앞에서 ‘온라인 나머지 공부’나 ‘온라인 맞춤형 숙제’ 같은 아이디어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것은, 교육계의 무사안일이 진보의 승인을 얻어 보편화된 탓임을.

이재명 후보의 공약으로 돌아가 보자. ‘디지털 전환’이라는 거창한 항목에 ‘학력’이라는 두 글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 기초학력은 ‘1교실 2교사제’의 몫으로 한정되고 ‘디지털 전환’은 태블릿 기기를 나눠주겠다는 수준으로 전락했다. 교육의 핵심은 교사와 소프트웨어인데, 최근 학교건물 구조나 태블릿 같은 하드웨어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한마디로 주객전도다. 적극적 교육활동에 나서려는 교사들의 교권을 보호하는 조례를 제정하고, 기업들이 탑재하고 교사가 선택하며 정부가 종량제로 후불하는 ‘인공지능 활용 학생별 맞춤형 숙제’ 플랫폼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범 교육평론가·<문재인 이후의 교육>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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