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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미래’가 떠들썩하게 돌아왔다. 별로 반갑지는 않다. 노동의 미래를 말하는 사람치고 밝고 희망찬 미래를 전망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덜컥 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나마 희망적인 미래를 말했던 이가 ‘세기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인데, 그의 예측에 따르자면 나는 지금 하루에 딱 3시간, 일주일에 15시간만 일해야 한다.

그러나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이미 자정이다. 게다가 세계 경제는 여전히 답답하고 실업이 줄어들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세계의 지도자들은 모일 때마다 제 길 찾겠다고 싸움질이니 그 모양새가 궁상맞은 겨울비 같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물론, 이번에도 정색을 하고 나타났다.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이 진행 중이라고 한다. 기왕의 자동화와 디지털화를 아우르는 포괄적인 체계가 갖추어지고, “뇌를 쓰는 일은 인간의 몫”이라는 통념을 뒤엎는 인공지능이 등장하면서 대규모 일자리 ‘숙청’이 예상된다면서 연일 적색경고다.

어느 경제학자들은 이런 ‘기술적 실업’의 대상이 누구일지 부지런히 따져 보았는데, 그들의 계산에 따르면 향후 20년 내에 47%가량의 일자리가 사라질 위험에 있다. 그동안 늘 폭풍권 바깥에 있었던 회계, 법률, 저술 등과 같은 고급 화이트칼라 직업군도 포함되었다. 펜을 든 사람도 피할 수 없는 태풍이라고 하니, 펜은 더 요란하고 시끄러워졌다.

한국도 예외 없다. 기업과 정치권은 일제히 새로운 시대를 맞아 미래지향적인 정책을 주문하는데, 내용은 아주 한국적이다. 자 여러분, 이제 과거를 잊고 미래를 준비하자. 입은 미래를 말하지만, 손은 ‘곤란해진 지금’을 향해 있다.

그렇다고 허투루 들을 일은 아니다. 맥도널드에서도 주문기계를 도입해 직원 숫자를 줄이는 마당에 모르쇠로 일관할 수는 없다. 일자리 양극화도 여전히 진행형이고, 개선 기미는 보이질 않는다.

하지만 미래의 예측이 믿을 만해야 대책도 세울 수 있다. 신뢰성 없는 예측에 맞춰 야단법석 피워 정책을 도입하면 인력 낭비고 자원 낭비다. 내일 무엇을 배우게 될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책을 펴두고 예습할 수는 없지 않나.

역사적 경험도 그리 좋지 않다. 1990년대 중반에는 정보기술의 획기적인 확산으로 대량 실업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을 담은 책이 나왔다. 공전의 대히트였다. 제목도 다소 살벌하게 <노동의 종언>이었는데, 실제로 노동이 종언되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군비 지출 같은 비생산적인 지출을 줄이고 사회서비스를 대대적으로 확충해서 일자리를 창출하자는 주장에는 귀가 솔깃했지만, 그 주장의 전제인 미래에 대한 예측이 틀렸으니 더 보탤 말은 없다.

조금 더 거슬러 가보자. 1950년대에 자동화가 일자리를 없앤다는 주장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1957년 국제노동기구 연례총회에서 이 주제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당시 로버트 위너(Robert Wiener)라는 사이버네틱스 전문가는 자동화로 인한 실업은 실로 막대해서 1930년대 대공황기의 실업을 “즐거운 조크”로 만들 것이라 단언했다. 20여년의 시간이 지나 이 문제는 다시 국제기구에서 논의되는데, 결론은 ‘사실무근’이었다.

기술변화가 일자리를 초토화시킨다는 주장은 일단 경계 대상이다. 대체적으로 파괴되는 일자리만 보고, 새로 창출되는 일자리는 잘 보지 못한다. 자신의 주장을 드라마틱하게 하고자 하는 인간의 심리이기도 하겠지만, 파괴의 장면은 당장 눈에 띄지만 창조의 장면은 쉽게 상상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래를 예측하는 이들이 가장 결정적인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는 역설. 그래서 경영학의 거두라 불리는 피터 드러커는 “미래를 예측하는 최선의 길은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했나 보다.

‘노동의 미래’의 귀환이 반갑지 않은 이유는 하나 더 있다. 미래 예측은 대부분 이미 보고자 하는 곳을 정해둔다는 점에서 폐쇄적이다. 그 바깥에 있는 것들은 과거, 그리고 ‘과거의 노동자’가 된다. 멸종을 앞두고 절치부심해야 하는 사람들. 이들은 계도와 훈계의 대상이 되고, 곧 잊혀진다. 그러다 보면, 정작 바뀌어야 할 현실은 마치 미래에서 자동적으로 해결될 것으로 내팽개친다. 어려운 오늘은 내버려 두고, 상상의 미래만 키우는 꼴이다.

‘노동의 미래’에서 배제된 미래는 가령 이렇다. 1950년대부터 진행된 기술변화와 고용 간의 관계에 대한 지루한 논쟁이 마무리되어 가던 1990년대쯤 국제노동기구는 ‘자동화된 세상’에 아동 노동과 강제 노동이 만연해 있음을 뒤늦게 발견했다. 19세기의 ‘해묵은’ 주제는 자동화 문제보다도 더 절실한 현재였고, 1950년대에 예상하지 못했던, 또는 보고자 하지 않았던 미래였다. 20세기 말과 21세기 초, 국제노동기구의 최대 현안은 아동 노동 철폐였다.

한때 ‘지식노동자’가 중심이 되는 ‘지식경제’를 국가의 근간으로 삼고자 했던 한국에서도 청소는 필요하다. 그래서 김포공항의 중년 청소노동자들은 정보화의 물결이 거세었던 지난 30년 동안 묵묵히 빗자루와 걸레를 들고 청소했다. 정보기술은 날로 세련되는데 용역기업은 ‘어제’와 같아서 그들은 험한 욕설, “성추행과 술대접 강요를 비일비재하게 당했다”. “성추행을 당하면서도 잘릴까봐 말하지 못했다.” 인터넷 세상에는 관련 법규가 잘 정리되어 있었지만, “그게 인권침해인 줄 몰랐다”. 그래서 힘을 모아서 항의했으나, “갠지스 강의 모래 수만큼 많은” 온라인 언론은 조용했다. 결국 삭발을 했다. 바리깡에서 잘려나가는 머리카락에 눈물이 맺히고서야 사람들은 ‘어제의 노동자’들을 찾아왔다.

컴퓨터와 정보화 덕분에 둔탁한 제조업 시대는 저물고 있다. 1980년대 말, 15살 문송면이 수은 중독으로 죽어가던 온도계 공장은 이제 없어졌다. 하지만 정보화 시대를 육체적으로 떠받치고 있는 반도체 공장이 죽음의 행렬을 이어간다. 23살의 황유미는 입사 일년 반 만에 죽었다. 차이점이라고 하면, 그때는 잘못과 결과가 분명했지만, 지금은 버티기와 불인정이다. 유족들은 여전히 길바닥에서 버티고 있다. 정보화가 알지 못했던, 여전히 알려고 하지 않는 ‘미래’다.

디지털 시대에도 건설 공사는 계속된다.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어이없이 떨어지고 부딪힌다. 며칠 전에는 철교에서 작업대 발판 지지대 철거 작업을 하던 이가 떨어져 죽었다. 나이는 겨우 29살, 추락한 높이는 불과 5m다. 디지털 세상의 재생복구 기능은 여기서만 예외다. 그들을 다시 이승으로 데려올 방법은 없다. ‘어제의 노동자’들이 없는 ‘노동의 미래’는 불모적인 사이버 공간일 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노동의 미래’에는 ‘어제의 노동자’가 가득하다. 추석을 앞두고 체불임금 소식이며 산업재해 소식은 여전하다. 날짜를 지운다면, 언제 적인지 알쏭달쏭할 지경이다. 다만, 그때는 기름 냄새 확 나는 신문에서 읽었고, 지금은 소파에 누워 부스스한 눈으로 스마트폰에서 읽을 뿐이다.

경제학 박사·‘우리는 조금 불편해져야 한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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