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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을 쓰려면 당연히 먼저 R을 내려받고 설치해야 합니다.’

기사 작성기나 워드프로세서가 아닌 프로그램에서 깜빡이는 커서를 마주한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그러니까, 기억을 되짚어보면 20세기의 마지막 해가 마지막이었다. (신문사가 아니었던) 첫 직장에서 신입사원 직무교육으로 C와 Java스크립트를 잠깐 배웠다. 그때 첫 느낌을 떠올려보면, 알파벳 같기는 한데 읽을 수 없는 러시아어를 마주한 느낌.

(지금은 사라진) 전화번호부의 무게감을 닮은 교재에 따르면 R은 ‘통계 계산과 시각화 작업용 무료 소프트웨어’다. 교재의 저자는 “문과생이 통계 분석하고 결과를 예쁘게 보여줄 수 있게 만든 코딩 언어”라고 설명했다. “그러니까 형도 할 수 있어”라는 격려와 함께였다.

“모든 시작은 기적의 문을 여는 열쇠이다.”(파우스트)

교재의 첫 문장이 자신감을 키웠다. 시작을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다. 야구선수 스즈키 이치로는 ‘준비의 준비’를 강조한 준비의 달인이다. 오랜만의 코딩을 위해 꽤 비싼 무접점 키보드를 샀다. 준비는 장비와 동의어라고 배웠다.

많은 코딩 언어가 그렇듯 “헬로 월드”가 시작이다.

print(“Hello, World!”)

## [1] “Hello, World”

이 정도는 가뿐하다.

상대 언어를 도외시한 ‘편싸움’

R 역시 ‘함수’와 ‘객체’가 기본이다. print( )는 ( ) 안의 내용을 출력하라는 함수다. object의 번역어인 객체는 일종의 ‘저장소’다. ‘object <- 1+2’는 1+2를 object라는 객체에 넣어둔다는 뜻이다. 데이터를 정리해, 객체에 넣어둔 뒤 함수를 이용해 필요한 결과를 끄집어내는 것이 R의 기본 구조다. 오케이, 기억났어. 패키지를 내려받고, 함수를 불러와서 데이터를 집어넣은 뒤 시각화하면 끝.

KBO리그의 연도별 좌타자 타석 수와 전체 타석 수를 입력한 엑셀 데이터를 열었다. read_excel 함수로 데이터를 읽은 뒤 kbo_pa 객체에 집어넣고, ggplot 함수로 이미지를 만든 뒤 animate 함수로 움직이는 이미지(gif)를 생성했다. 화면에 아름다운 파란 선과 빨간 선이 꿈틀 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신감이 샘솟았다. 이제 실전이다. 1953~1957년생 여성 노동자의 연도별 직업군 변화 그래프를 ‘움직이도록’ 하는 게 목표다. 지면 작성에 사용된 데이터를 전달받아 앞의 과정을 거쳤다. 어라, 그런데 왜 안 되지. 항목이 3개여서인가. 역시 이게 한계인가.

한 시간 넘게 씨름을 한 끝에 답을 찾았다. 데이터의 정렬 방식이 문제였다. 우리에게 익숙한 표는 세로축에 연도가, 가로축에 항목이 들어간다. 1985년의 총 취업인구는 2275명, 여성 취업인구는 639명, 여성 중 제조업 종사자는 132명인 식이다. 이 4가지 데이터가 한 행에 표시된다. 가로와 세로가 만나는 곳의 값을 읽어내는 게 ‘인간’의 방식이다.

컴퓨터 언어는 구조가 다르다. ‘1985년, 총 취업인구, 2275명’이 한 세트다. 다음 행에 ‘1985년, 여성 취업인구, 639명’이 다른 한 세트가 된다. 이른바 ‘세로 쌓기’라 불린다. (40대 남성) 인간에게는 너무 불편한 구조지만, 컴퓨터는 이래야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다. 교재에 따르면 “R 코딩 작업의 8할은 데이터 정제 작업”이고 이는 구조를 맞추는 과정이다.

지금 대선 언어는 모두를 소외시켜

언어의 차이는 구조의 차이에서 나온다. 구조를 먼저 이해해야 올바른 언어 구사가 가능하다. 나의 언어로, 너를 이해시키려면 너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먼저다. 20대 대선의 언어가 세대와 진영, 성별과 계층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은 더욱 복잡해진 2022년의 구조를 이해하려 하지 않은 채 편만 갈라 쏟아지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언어 놀이, 규칙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있어야 한다. R과 씨름하는 동안 절실하게 배웠다.

지금 대선의 언어는 모두를 소외시키는 언어다. 이대로라면 아무리 엔터를 눌러도, 에러 메시지만 뜬다. 대선이 대선다워지기 위해 필요한 것. ‘진영’이라는 중력을 벗어나기 위한 초속 11.2㎞.

이용균 뉴콘텐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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