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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4년 전 초여름, 중국 복건성 북부에 위치한 무이산 구곡계에 갔었다. 죽벌을 타고 구곡계를 미끄러지듯이 내려오기도 했으며, 천유봉에 올라 뱀처럼 구불거리는 물길과 조화롭게 솟아오른 바위 봉우리들을 즐겼다. 조선의 사대부들이 동경해 마지않던 그곳에 간 까닭은 주희(1130~1200) 때문이 아니었다. 나를 그곳으로 이끈 사람은 서하객으로 널리 알려진 서홍조(1586~1641)였다. 

2011년 가을에 <서하객유기>가 완역되어 출간되었고 그때는 내가 큰 수술을 마치고 정양을 할 때였다. 두어 달 동안 제대로 걷지도 못하여 무료했던 시간에 그 책을 읽으며 다시 일어설 꿈을 키웠으니 내게는 그 어떤 신약보다 좋은 약과 같은 책이었다. 

3년 후, 몸이 안정을 되찾자 대뜸 서홍조가 남긴 유기 중 후반부 3분의 1을 차지하는 운남으로 향했다. 리장에서 소수민족들을 찾아 사진을 찍으며 함께 춤을 추고 놀기도 하고 발병이 나서 꼼짝 못한 서홍조를 돌보아 집으로 갈 수 있게 도와준 나시족들의 문자인 동파문자의 매력에 흠뻑 빠지기도 했다. 그러다 닳고 닳아서 반질거리는 리장의 골목길을 걷다가 나를 다시 세상으로 나서게 해 준 서홍조에게 고마워하기도 했다. 어떤 여행기를 보고도 리장에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그가 남긴 유기를 제대로 읽자마자 불쑥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리학자로 알려졌지만 탐사와 탐험에 가까운 그의 글은 굉장했다. 고대사로부터 이어지는 역사는 물론 뜻밖에도 사람들의 삶 속에 녹아 있는 민속이나 풍속과 같은 것까지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의 지식이 방대했다는 것이고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안목이었다. 그 지식과 안목이 빚어낸 그의 사상은 더욱 굉장하여 만약 그 어떠한 경계가 있다면 그곳 너머에 서 있는 것과도 같았다. 그가 갔던 길은 용기가 없다면 결코 나설 수 없는 길이며, 스스로 낸 용기 덕분에 그는 경계 너머로 향하는 길을 거침없이 걸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보다 앞서 운남에서 또 한 사람이 기존의 삶을 접고 새로운 꿈을 펼쳤다. 그는 호를 탁오로 쓴 명나라의 사상가이자 양명학자인 이지(1527~1602)다. 전국을 떠돌며 벼슬살이를 하던 그는 1576년 운남에 부임하여 1580년에 임기가 다했다. 유임해 주기를 요청받았지만 굳이 사양하고 운남을 떠돌며 여행하려는 꿈을 꾸었다. 그는 젊었을 적에는 관직으로 중국을 떠돌고, 운남에서 벼슬을 던지고부터는 호북성 마성과 황안을 시작으로 무창과 용호까지 거처를 옮기며 또다시 떠돌았다. 그리고 1596년부터는 산서성을 거쳐 북경으로 올라갔다가 배를 타고 대운하를 이용하여 남경으로 가서 지불원이라는 사찰에서 머리를 깎았다. 그러나 지불원이 화재로 소실되자 북경 근처 통주로 갔다가 감옥에 갇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은 기존 관료들이 그가 세상에 펼쳐 놓은 생각이 혹세무민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운남에 부임하던 해인 1576년에 말한다. 지난 50년의 인생이 한 마리 개와 다를 바 없었다고 말이다. 한 마리 개가 그림자를 보고 갑자기 짖어대자 뒤에 있던 개는 영문도 모른 채 같이 짖었다는 이야기다. 앞에 먼저 짖은 개는 공자를 비롯한 성인들이고 덩달아 짖은 개는 자기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그러곤 스스로 어린 시절부터 공자를 배웠으나 정작 무엇을 배웠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또 말한다. 공자를 존경하지만 공자의 무엇이 존경할 만한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고 말이다. 

그뿐일까. 공자와 맹자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을 내놓은 이지는 앞에 말한 구곡계 제5곡에 무이정사를 짓고 살았던 주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 후 이지는 성리학을 버리고 마음을 다스리는 양명학을 취하였으며 불교와 도교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가 살았던 16세기는 성리학의 세상이었는데 이처럼 대놓고 싸움을 건 셈이었으니 어찌 그가 온전할 수 있었겠는가. 

서홍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유무이산일기>에서 제5곡의 자양서원을 찾았지만 주희에 대한 찬탄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사당에 배알했다’는 짧은 문장으로 방문의 소회를 대신했을 뿐이다. 전통사회 지식인의 일원이었던 그로서는 주희를 모른 체할 수 없었을 것이지만 그의 관심은 오히려 제4곡과 3곡 사이 홍교판이나 가학선관과 같은 애묘에 가 있었다. 주희와 애묘는 아무리 해도 서로 엮어질 수 있는 관계가 아니므로 어쩌면 그 행간에는 주희를 부정하는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처럼 이지와 서홍조는 기존 성리학에 젖어 있던 이들과는 달랐다. 이지가 성인이라는 이들의 절대적인 권위를 부정하며 강대강으로 맞부딪쳤다면 진취적이며 개방적이었던 서홍조는 낡은 전통을 고수하는 보수적인 성리학자들과 맞부딪치지 않았다. 전통적 지식인의 표상처럼 여겨지던 출사를 포기하고 길거리로 나섰다는 것 자체가 기존 사회질서에 대한 무언의 저항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그가 찾아다녔던 소수민족이나 사대부들이 거들떠보지 않던 민중들의 생활 풍습이나 민속에 관한 기록에 몰두한 것 또한 전통사회 지식인에 대한 이의제기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얼마 전, 지인과 영산강 답사를 다녀오는 자동차 안에서 인간이란 살아가면서 확장되어야 하는 존재라는 이야기를 했다. 인간이란 컴퓨터의 기능이나 성능을 확장할 수 있는 슬롯과 같은 것을 무한대로 지니고 있다. 그곳에 나와 같은 생각을 지닌 칩을 꽂으면 더 이상 넓어지거나 깊어지지 못하지만 나와 다른 생각의 칩을 꽂는 순간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고 말이다. 

이처럼 기존 사회질서와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들로 인하여 세상은 조금씩 넓어져 가고 아름다워진다. 당신은 무엇과 다른가!

<이지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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