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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워브리지와 런던타워가 빤히 보이는 템스강가 호텔에서 보름 가까이 머물렀다. 창 아래로 2000여 년 가까이 서 있는 성벽의 잔해가 보이는 곳이었다. 성벽은 런던 월(London Wall)이라고 부르며, 학자들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서기 190~225년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성벽은 높이 6m, 길이 5㎞에 달했으며, 런던타워 앞 템스강 기슭에서 시작하여 당시 로마인들이 살았던 론디니움(Londinium)을 에워싼 후 알파벳 D 형태를 이루며 템스강의 상류 쪽 기슭으로 이어졌다.

현재 성벽은 지하철 타워 힐 역 바로 앞에 가장 길고 웅장하게 남아 있으며, 그곳에서 성벽은 끊어졌다가 다시 현대식 건물 틈새로 길이 60~70m 남짓하게 이어진다. 그곳으로부터 런던뮤지엄까지 이어지는 도로 주변은 금융 중심가답게 초현대식 고층건물들이 즐비하다. 그 건물들 벽에 간혹 파란색 표지판이 붙어 있다. 타워 힐 앞 성벽에는 2번 표지판이 붙어 있으며, 통틀어 모두 21번까지의 표지판이 2000여 년 전 런던 월의 존재를 알려 주고 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그렇기에 빼곡하게 들어 선 고층 건물들 사이로 걷는 길은 로마인들이 닦아 놓은 길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곧 다른 곳으로 이전한다는 런던뮤지엄 또한 론디니움을 지키던 요새의 터 위에 지어졌으며 타워 힐로부터 그곳으로 가는 길은 대개 성벽이 세워졌던 곳들이며 로마인들이 걸었던 길이다. 뮤지엄 못 미처 남아 있는 런던 월 잔해 곁에는 중세에 들어섰던 교회조차 허물어져 볼품없지만 갖가지 꽃이 가꿔진 정원이 성벽을 감싸고 곁에는 카페까지 들어섰다. 더구나 그곳에서부터 ‘스카이워크’라고 부르는 공중 육교들이 건물 사이를 이어 주며 박물관까지 오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사실 그곳은 론디니움을 거니는 내내 나의 중요한 휴식 장소이자 샌드위치나 샐러드로 때우는 점심 식사 장소이기도 했다. 2000여 년 묵은 성벽에 기대 앉아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생소할 만큼 훌륭한 경험이었다. 그러나 놀라움은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기운을 추스르고 그곳에서부터 군데군데 허물어진 성벽을 따라 중세시대에 세워진 이발사와 외과의사의 집을 지나면 18번 표지판이 나타난다. 그런데 그곳은 지하 주차장 입구이다. 주차장 안을 기웃거리기는 했지만 하필 표지판 앞에 중세시대의 망루가 부서진 채 있으니 처음에는 그것이려니 하고 돌아서고 말았다. 

그날 밤, 고고학을 공부하는 영국인 지인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무턱대고 물었다. 왜 거기 표지판이 있느냐고, 갸우뚱거리며 10m 남짓 들어가다가 돌아 나왔다고 했더니 그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곤 내일 다시 가서 지하 주차장 안으로 깊숙하게 들어가 보라고 했다. 이튿날 눈을 뜨자마자 부랴부랴 그곳으로 향해 그가 말한 기둥의 번호를 찾았다. 멀리서 그 번호가 보일 때쯤 소름이 돋으며 전율이 일었다. 기둥 근처에 성벽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거창하게 보호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렇게 시멘트로 바른 겉이 떨어져 나가 속이 훤히 드러난 콘크리트구조물처럼 로마와 중세를 거친 성벽이 주차장 서너 칸을 차지한 채 남아 있었다. 

버려진 듯 무심하게 그곳에 남아 있는 성벽 앞에서 입을 다물지 못했고 말을 잊었다. 그것은 어이없거나 참담함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경이로운 아름다움에 대하여 갖춘 예의였다. 허물어지거나 부서진 것들의 아름다움은 새것들이 감히 탐할 수 없는 분방함과 눅진함이 배어 있다. 낡은 전등 불빛이 희미하게 비치는 로마시대 성벽이 지하 주차장 안에 보존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아름다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더구나 그 규모는 앞에 말한 2번 구역의 타워 힐이나 그 옆 3번 구역의 성벽에 비할 바가 되지 않지만 그것조차 허물어버리지 않고 남겨 둘 수 있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생각은 성벽보다 더 높고 견고한 것이지 않겠는가. 

그 다음 날은 길드 홀(Guildhall)을 찾았다. 여러 건물이 에워싼 길드 홀 광장에는 독특하게 검은 돌이 점점이 박혀 있다. 길드 홀 아트갤러리 지하에는 론디니움의 원형극장이 폐허가 된 채 남아 있으며, 광장의 검은 돌은 지하에 있는 원형극장의 외곽을 따라 경계를 표시해 놓은 것이었다. 그 일은 최근에 이루어진 것이다. 갤러리를 재정비하기 위하여 1987년 지금의 아트갤러리를 철거했다가 그 지하에 원형극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자 그때부터 원형극장의 보존을 위하여 갤러리 설계를 다시 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그것은 올더게이트(Aldergate)나 빌링스게이트(Billingsgate)의 오피스 빌딩 지하에 있는 성벽이나 로마시대 주택과 목욕탕도 마찬가지다. 앞서 말한 모든 장소의 특이한 점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사유재산권을 앞세운 건물주들의 재산권 행사에 의하여 유적들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 놀랄 일은 금융 관련 미디어그룹인 블룸버그(Bloomberg)의 유럽 본사건물 지하이다. 지하 3층 깊이인 지표면 6m 아래에는 신비한 미트라(Mithras) 신을 모신 로마의 신전 미트라에움(Mithraeum)이 폐허가 된 채 남아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폐허가 된 2000년 전 장소를 발굴하고 보존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 그 역사적 장소에 21세기의 기술까지 덧입혀서 극대화된 제례의 현장을 재구성하여 공개하는 그들은 도대체 누구일까. 이젠 익숙해졌지만 처음 그곳을 찾았을 때는 거푸 세 차례나 방문할 정도로 매력적인 공간이었다. 미트라에움에서 되돌아 나올 때마다 역사적 장소를 매개로 한 공공이익 창출에 있어서 기업들의 역할이 무엇인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뿐일까. 바실리카(Basilica) 구조물이 남은 리든홀 마켓(Leadenhall Market)의 이발소, 부두 건설에 사용됐던 나무 기둥이 남아 있는 순교자 성 마그누스(St Magnus) 교회와 같은 론디니움의 흔적도 찾아 다녔다. 그런데 그러한 장소에 갈 때마다 로만브리튼(Roman Britain)의 역사보다 그 역사를 외면하지 않고 더불어, 함께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에 대한 경외심이 일었던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사람이 곧 역사이기 때문이다.

<이지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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