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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여, 이들을 돌보소서!”

15년 전 어느 인터넷 기사에 달렸던 댓글이다. 남편과 아이는 장애로 일상생활이 어렵고 생계를 책임진 아내이자 엄마인 40대 여성도 당뇨와 합병증으로 고통받고 있는 가족의 얘기였다.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댓글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국가’를 호명했기 때문이다. 사회복지단체에서 모금을 위해 올린 기사였지만 댓글 작성자는 가족을 돌봐야 할 책임이 국가에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지난주 노모와 장애인 형을 살해하고 동생도 죽음을 선택했다는 기사가 보도됐다. 2014년 송파 세 모녀 사건, 2018년 증평 모녀 사건, 그리고 지난달 발생한 관악구 탈북 모자 아사 사건의 연장선상에 있다. 댓글을 살펴봤다. 공통적인 정서는 슬픔에 대한 공감이었다. 친족 살해를 비난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가족이 겪었을 고통과 슬픔에 공감하고 불가피한 선택으로써 살해와 자살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이처럼 사회취약계층에 대한 국민 정서는 대체로 일치하고 국가도 꾸준한 제도 도입으로 이들의 생활을 보장하려 해왔다. 2000년 10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도입됐고 ‘송파 세 모녀법’을 제정해 수급권자를 능동적으로 발굴하도록 했다. 또 법이 시행되어도 정작 ‘송파 세 모녀’는 부양의무자 기준에 막혀 수급 대상자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과 장애인운동단체의 꾸준한 요구로 정부는 올해 부양의무자 기준을 완화하고 3년 내로 완전히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제도만으로는 부족하다. 송파 세 모녀의 죽음 이후 전국에서 7만4000여명이 수급 신청을 했지만 혜택받은 경우는 9%에 그쳤다. 예산 때문이다. 제도 개선을 통해 수급 대상을 늘려도 예산이 없으면 실제 혜택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탈북 모자 사건도 기초생활수급 자격은 갖췄지만 이혼서류 외에 ‘이혼 확인서’를 추가로 받아오라는 구청의 요구에 신청을 포기하면서 발생한 일이다.

그렇다면 예산은 어떻게 확보해야 할까? 기사의 댓글에서는 슬픔 외에 또 다른 정서도 발견됐다. 그것은 분노였다. 슬픔만 표출된 경우 대체로 명복을 빌거나 다음 생에는 부자로 또는 건강하게 태어나라는 기원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분노가 포함된 댓글들은 그들의 슬픔이 개인의 잘못이나 운명 탓이 아니라 국가에 있다는 사실을 적시했고 일부는 공무원의 책임을 포함해 국가시스템의 원활한 작동을 촉구했다. 그리고 더 많은 댓글에서는 예산 문제가 직접적으로 거론됐는데 크게는 새로운 재원의 확보와 기존 예산의 재배분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새로운 재원의 확보로는 친일파 후손의 재산 환수와 재벌에 대한 중과세가 주장됐다. 또 기존 예산의 재배분은 다른 부문의 예산을 줄여 복지 부문에 투입해야 한다는 것과 복지예산 내의 재배분을 주장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었다. 줄여야 할 부문별 예산으로는 국방비와 대북 지원금, 국회의원 급여 등이 꼽혔다. 앞의 둘은 북한에 대한 시각 또는 통일에 대한 전망이 맞서는 경우다. 복지예산안에서는 난민과 외국인노동자, 다문화가정 지원금을 삭감해 취약계층 복지에 투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보편적 복지를 줄이고 선별적 복지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법 됐는데 삭감해야 할 것으로 청년실업급여, 노인연금 등이 꼽혔다.

그런데 이 같은 댓글이 의미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 정치적인 것은 순수하지 못한 것이라는 사고가 퍼져있지만 기사의 댓글들이야말로 정치적인 것 아닐까? 정치의 본질은 권력투쟁과 그에 따른 자원의 배분에 있다. 각각의 댓글들은 한정된 자원을 원하는 방향으로 배분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분히 정치적이다. 반면 슬픔만 표출된 댓글의 경우 이 같은 정치적 투쟁에 참여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명복을 빌고 다음 생을 기원하는 것만으로 국민의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비정치적인 태도는 국가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흡사 내전과 같은 갈등을 자아냈던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관련 사태가 대통령의 임명 강행으로 일단락됐다. 소모전처럼 비친 이 갈등 또한 하나의 권력투쟁이자 자원 배분을 위한 욕망의 충돌이다. 국민은 더욱 정치적이 되어야 한다. 한 번의 선거가 아니라 더 많은 정치적 결정에 자신의 욕망을 투영해야 한다. 국가는 이미 우리의 삶 속에 빈틈없이 들어서 있고 정치가 그 방향과 내용을 결정하고 있다. 정치를 외면하고 기피할 것이 아니라 더욱 정치적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시끄러운 갈등과 투쟁의 결과를 미리 우려할 필요는 없다. 덜 가진 자의 침묵은 결국 더 가진 자에게 유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임미리 | 고려대 연구교수·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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