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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하나. 사회생활에 치여서 신혼여행 말고는 아내와 여행다운 여행을 해보지 못했다고 생각한 남편이 은퇴한 뒤에 아내에게 패키지 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우리가 그 정도 사이는 아니지.” 부부 중 한 명은 사회생활에, 한 명은 가정에 집중하면서 ‘부부적 거리 두기’를 하고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에피소드 둘. 유럽은 호텔 객실에 트윈 베드가 있는 방이 적은 편이다. 얼마 전 동유럽 여행 때도 트윈 베드 방이 좀 부족했다. 그래서 일부는 더블침대를 써야 하는 상황이라 부부를 주로 더블 침대 방에 배정했다. 그때 한 부부가 동시에 항의했다. “아니 부부라고 더블침대를 쓰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 부부는 진심으로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에피소드 셋. 여행에 와서 “저는 아내를 주인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섬기면서 지냅니다”라고 은퇴 이후의 부부관계를 말하는 중장년 남성이 있었는데 바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제지당했다. 그런 얘기하지 마시라고. 여기 온 부부 중에 섬김받지 못하는 부인들이 들으면 기분 나쁠 소리라고.

에피소드 넷. 여행에서 보면 분명 부부가 왔는데 엄마와 아들처럼 보이기도 하고 아빠와 딸처럼 보이기도 한다. 챙기고 챙김받는 관계가 다른데, 위험한 상황이 지났을 때 1960년대생 이전은 아내가 남편에게 “여보 괜찮아?”라고 묻고 대략 1970년대생부터는 남편이 아내를 챙기는 모습을 보게 된다. 

에피소드 다섯. 여러 가족이 함께 캠핑을 갔을 때 벌어진 일이다. 사사건건 아내에게 잔심부름을 시키는 남편이 있었다. 이것 가져와라, 저것 가져와라, 계속 아내를 닦달했다. 보다보다 못한 다른 여성이 버럭 했다. 

“아니 ○○아빠, 그러지 마. 한번 둘러봐~ 여기 누가 아내한테 그런 잔심부름을 시켜. 그러려면 캠핑을 왜 와? 그러지 마. 집에 가서도 그러지 마!”

추가 에피소드. 이건 직접 본 장면은 아니라 60대의 여행클럽 멤버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친구들 모임에 갔는데 친구들의 근황을 듣던 한 여성이 갑자기 통곡을 하더란다. 이렇게 말하면서. “나만 남편 있어, 나만 남편 있어.” 어떤 맥락으로 이런 이야기를 했을지 짐작되었다.

삼시 세끼를 함께하니 여행에서는 자연스럽게 부부관계가 보인다. 그리고 여행이 이들에게 미치는 영향도 보인다. 아이 넷을 키우다 보니 ‘그리 사이가 좋지 않은 부부’가 되었다고 말했던 부부가 있었는데 둘이 여행친구가 되면서 관계가 좋아졌다. 

그런가하면 부부가 여행 스타일이 달라서 각자 여행을 하는데 물리적으로는 멀어지지만 외로워서 서로 연락을 자주하게 되어 심리적으로는 가까워졌다는 부부도 있다.

여행은 일상의 공간과 시간과 그리고 접하는 인간, 이 세 가지를 변경시켜 준다. 이 세 가지가 변하면 생각하는 바도 달라진다. 다른 곳에서, 다른 시간을 살면서, 다른 관계를 맺으면서 자연스럽게 ‘관계의 재구성’이 일어난다. 부부관계도 그렇다.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굳어졌던 관계를 여행에서 되돌아보게 된다. 한국 중장년 남성에게 여행이 필요한 또 하나의 이유다.

<고재열 여행감독>

 

 

연재 | 인생+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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