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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문화와 삶

작곡상의 의미

opinionX 2017. 10. 19. 11:14

얼마 전 작곡가 진은숙의 ‘시벨리우스 음악상’ 수상 소식이 전해졌다. 한국 연주자들의 국제콩쿠르 수상도 반가운 일이지만, 내겐 이 소식이 훨씬 묵직하고 의미 있게 다가왔다. 국제콩쿠르가 세계무대로 나가려는 젊은 음악가들의 등용문 구실을 한다면, 이 상은 이미 거장이 된 이에게 부여되는 영예이기 때문이다. 연주가 아닌 작곡의 영역에서 이런 경지에 오르는 일이 쉽지 않음을, 또한 세계무대에서 이를 제대로 인정받기는 더더욱 어려운 일임을 잘 알고 있기에 이 소식이 남달리 여겨지는지도 모르겠다.

상의 권위는 수상자들의 면면에서 나온다. ‘시벨리우스 음악상’은 몇 년에 한 번씩 비정기적으로 당대의 저명 클래식 음악 작곡가에게 주는 상이다. 1953년 핀란드 ‘비후리 재단’이 시벨리우스에게 첫 상을 수여하며 그의 이름을 따 ‘비후리 시벨리우스 상’이라 이름 붙였고, 이후 힌데미트·쇼스타코비치·스트라빈스키·브리튼·메시앙·루토스와프스키·펜데레츠키·리게티·쿠르탁 같은 20세기 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작곡가들이 이 상을 받았다. 시벨리우스의 뒤를 잇는 라우타바라·린드베리·사리아호 같은 핀란드 작곡가들도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2015년 버트휘슬에 이어 올해 스무 번째 수상자로 이름을 올린 진은숙은 최초의 아시아 출신에다 사리아호에 이은 두 번째 여성 작곡가다. 비주류일 수밖에 없는 존재 조건에서 누구라도 인정할 만한 확고한 음악세계를 구축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진은숙의 음악은 유럽인들이 흔히 떠올리는 아시아 작곡가의 표상에서 벗어난다. 1985년 유럽으로 건너간 그녀는 자신을 타자화하는 이런 선입견에 맞서야 했다. 새롭고 대체 불가능하며 유의미한 작품을 쓰는 데 출신 지역의 정체성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빈 오선지를 앞에 두고 오롯이 자신의 내면과 마주해야 하는 순간 중요한 것은 오랫동안 숙성시킨 아이디어가 원하는 음악의 형태를 갖추도록 정교하게 세공해나가는 작업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벌레로 느껴지고 수없이 지옥을 경험하면서도 진은숙은 음악의 완성도에만 천착했다. 작품 위촉만으로 살아가는 전업 작곡가의 삶을 고수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음악이 훌륭하면 결국 청중이 알아줄 거라는 믿음, 온 힘을 다해 그에 걸맞은 수준의 작품만 세상에 내놓겠다는 의지, 그것이 오늘의 진은숙을 만든 원동력 아니었을까.

국내 청중에게 진은숙의 음악은 아직 낯설다. 하지만 음악회장에서 혹은 음반이나 유튜브로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생황 협주곡들을 들어본 이라면 그녀의 음악이 뿜어내는 에너지와 명료함 가운데 펼쳐지는 환상적인 음향적 색채에 매료된다.

최근 그녀는 인간 존재의 본질이나 우주의 생성 같은 묵직한 질문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작년 8월 서울에서 초연된 혼성합창·어린이합창·관현악을 위한 <별들의 아이들의 노래>는 클래식 FM과 포털 사이트를 통해 생중계되며 온라인으로도 많은 이들이 들었는데, 공연 후 나온 기사나 소셜미디어에는 현대음악에 대한 편견을 날려준 감동적인 음악이었다는 얘기가 오갔다. 이 작품에서 세월호의 아이들을 떠올린 이들도 있었다.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그 안에 담긴 인간과 우주에 대한 깊은 통찰이 각자의 방식대로 청중의 마음에 가 닿아 공명했던 것이리라.

문학상을 받으면 작품이 불티나게 팔리지만, 현대 작곡가가 권위 있는 상을 받았다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진 않는다. 클래식 음악 애호가조차 당대의 음악에는 큰 흥미를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즐겨 듣는 고전들도 한때 새로운 음악이었다. 낯선 음악이 연주를 거듭하며 점차 깊은 감동을 선사하는 고전이 되어온 것이다. 새로운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는 것은 미래의 고전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진은숙의 이번 수상이 그녀의 음악을 접하는 계기가 되길, 나아가 새롭게 창작되는 이 시대의 음악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개인의 예술적 성취가 사회의 문화적 역량을 키우는 데 발판이 되는 것. 작곡가가 받은 상이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은 바로 그럴 때이다.

<이희경 음악학자·한예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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