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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적 의미의 재현은 묘사, 상징, 구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어떤 대상의 현존을 전제로, 그것을 다시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재현이란 단어에는 ‘다시 나타나다 혹은 다시 보여주다’라는 뜻도 내재되어 있다. 재현은 표상이기도 하다. 주체와 대상 사이의 지울 수 없는 거리를 상정한 후, 주체가 대상에 대해 갖는 인식이 다름 아닌 ‘표상’이다. 그러니까 재현이란 ‘이미 있는 것을 다시 있게 하는 것이고 보았던 것을 다시 보여주는 행위’이다. 따라서 그것은 존재하는 대상을 연상하게 하고 추측하게 해준다. 즉 재현이라는 말에는 현상에 대한 부정, 그리고 현상 뒤의 어떤 실체나 본질에 대한 믿음이 내포되어 있다. 더불어 그것은 항상 부재를 환기하는 안타까운 상실감의 정서를 간직하면서 진행된다. 재현적 회화는 보이는 외계의 대상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 대상의 모방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림으로 보여지는 것은 화면 밖의 사물과 유사한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출발하여 더 멀리 간다. 조형적 재현이 유사를 내포할 수 있지만 그러나 닮았다는 것이 전적으로 재현으로만 귀착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재현에 의해 전적으로 흡수되거나 점령당하지 않는 것이 바로 그림의 세계이지 않을까? 서구의 전통회화는 눈에 보이는 외부세계를 강박적으로 재현하려 했고 이후 현대미술은 그러한 전통을 해체한 결과 즉물적인 사물로 귀결되어 종내 미술이 사라지는 아이러니를 초래했다. 반면 우리 전통회화에서 재현이란 단지 눈에 보이는 가시적 존재의 닮은꼴에 머무는 것만은 아니었다. 아니 그것은 오히려 큰 의미가 없는 일이거나 가당치 않다고 보았다. 그림은 가시적 세계에서 비가시적 세계를 보여주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런 기운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그림이었던 것이다. 망막에 전적으로 의지한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접한 세계의 기운을 통감각적으로 전달하려는 시도, 어쩌면 현상학적인 체험을 시각화하려는 시도가 아니었을까?

최근 한국 화단에 새삼 재현 회화, 이른바 극사실 회화가 번성하고 있다. 미국에서 1970년대 대두된 포토리얼리즘과 한국에서도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를 풍미했던 극사실주의가 지금 왜 다시 부활하고 있을까? 혹자는 손의 기능이나 묘사력에 의존하면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그림을 두고 회화의 복원 내지는 손의 회복 같은 거창한 의미로 포장하고 있고 작가들 또한 이러한 수사를 자신의 작업 알리바이로 삼고 있다.

우선 새로운 환영주의로 재편되고 있는 이 회화는 인터넷과 멀티미디어의 첨단화와 대중화의 결과로 보인다. 이른바 ‘디지털 미디어 환경의 회화적 분열’ 현상이 그것이다. 대부분 화가들이 모니터를 통해 습득한 이미지 정보를 조합하는 것으로 회화를 구성하고 있기에 정작 현실은 지워지고 매체가 생산한 이미지들과 그 이미지를 재조합하는 현재적 상황을 가지고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물은 캔버스가 아니라 일종의 ‘스크린의 확장’으로 보인다. 이른바 ‘시뮬라크라’가 회화를 잠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회화는 무척 공허하다. 따라서 오늘날 극사실적인 회화는 대부분 주어진 사물의 표면을 기계적으로 묘사하는 선에서 머물고 있다. 감정을 지우고 서늘하게 대상의 피부에 육박해 관능적으로 표면에 집착한다. 매끈하고 선명하며 오로지 표면밖에는 없다. 언어와 개념을 지우고 그저 사진처럼, 스크린처럼 그리고 예쁘고 감각적인 사물의 표면만을 정교하게 묘사하는 것은 어쩌면 의미를 대신하는 집요한 그리기인데 여기서 그 집요하고 지루한 묘사는 일종의 권태로움의 반영이기도 하다. 감각적인 사물과 기호들을 가지고 유희하는 일이자 그것들과 한 몸으로 접속되는 이 회화는 매우 자폐적인 그리기이자 동시에 그러한 삶을 정확하게 반영한다. 담론과 주제를 지워버리고 그저 그린다는 사실, 그림 그리는 행위 자체에 몰입하는 단조로운 그리기일 수 있다. 미술·회화가 무엇인지, 재현이 또 무엇인지 등에 대한 진정한 고민을 밀어낸 자리에, 현실이 사라진 장소에 단지 오늘날 시각 환경이 되어버린 스크린을 닮은 그림을 그리고 있거나 그저 그림을 지속하고 있다는 행위 자체를 미술·회화로 대신하고자 하는 욕망만이 대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를 다소 편하게 제공해주는 것이 지금의 극사실주의 그림의 저간에 짙게 깔려있다고 생각한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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