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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이 틀림없어. 평일 아침에 흙 묻은 등산화를 신고, 허름한 배낭을 멨다. 게다가 버스비가 얼마인지도 모른다. 분명 간첩이야. 저걸 어떻게 신고하지? 가다가 파출소 앞에 차를 세워야겠다.’

 

1970년대가 아니었다. 1987년 민주화항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86년이었다. 나는 초등학생도 아니었다. 군대까지 다녀온 스물아홉 먹은 멀쩡한(?) 청년, 게다가 버스 운전사였다. 그런데 아침에 내가 모는 삼화교통 333번 버스에, 어릴 적 반공 세뇌 교육으로 배운 그런 간첩 행색의 남자가 탔다. 나는 룸미러로 그자를 훔쳐보면서 서울역 맞은편에 있는 파출소에 버스를 대고 얼른 뛰어가 신고했다. 그런데 경찰이 와서 조사해 보니 간첩이 아니라 평범한 시민이었다. 부끄러웠다.

 

이렇게 부끄러운 기억을 끄집어내는 건 요즘 ‘박근혜를사랑하는모임’(박사모) 집회에 나오는 사람들 때문이다. ‘북한지령 망국촛불’이라고 쓴 팻말을 보면 내가 버스 운전할 때 간첩 신고한 것과 너무 흡사하다.

 

“도대체 대통령이 탄핵당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사람도 있다. 내가 그 당시, 집회하는 대학생·시민들을 보고 ‘도대체 왜 집회하는 거야?’라고 궁금해했던 것보다 더 세상을 모르고 있다.

 

사실 박사모 같은 사람들을 주변에서도 가끔 본다. 얼마 전에 방송대 수업을 들으러 갔을 때도 그런 사람을 만났다. 일흔 정도 돼 보이는 방송대 학생이 내 가슴에 달린 백남기 농민 추모 리본을 보더니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난 백남기 그 사람, 살아온 게 마음에 들지 않더라.”

 

지하철에서 만난 어떤 사람은 내가 달고 다니는 세월호 배지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아니, 다 끝났는데 아직도 달고 다니세요?”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는 지난주에도 있었다. “아니, 대통령 7시간이 왜 그렇게 중요하죠?” 대꾸할 말이 없었다. 어이가 없어서.

 

박사모들은 어릴 때 나처럼 반공교육에 세뇌된 사람들이다. 나는 다행히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나 리영희의 <반세기의 신화> 등 다양한 책을 보면서 세상을 배웠다. 그런데 박사모들은 그때 세뇌된 상태로, 주로 텔레비전을 보고 세상을 판단한다. 전엔 박정희, 요즘은 박근혜에게 장악돼 정권의 나팔수 노릇을 하고 있는 공중파 방송만 보니 그 의식은 변하지 않는다.

 

하긴 TV조선 같은 종편은 더 심하다. 2011년 12월 조선일보 기자 박은주가 TV조선 방송에 나와 박근혜를 향해 “형광등 100개를 켜놓은 듯한 아우라”라고 했다. 다른 진보언론이나 인문학 책을 보지 않고 그런 방송만 보니 세상이 제대로 보일 리 없고, 꼴통 보수의식이 강화될 수밖에 없다. 어떻게 보면 보수언론이 박사모 같은 단체를 만든 주범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박근혜 게이트가 세상에 드러난 건 진보·보수언론의 합작품이었다. 박근혜 불통 정권을 일관되게 비판해온 매체는 경향신문, 한겨레이지만, 2016년 7월26일 ‘청(와대) 안종범 수석, 500억 모금 개입 의혹’ 기사로 K스포츠·미르 재단 의혹을 처음 보도한 매체는 TV조선이었다. 그리고 다시 진보언론이 국정농단한 최순실을 수면 위로 끌어내고, JTBC, 조선일보가 가세하면서 박근혜 게이트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끝까지 침묵하던 공영방송은 나중에 어쩔 수 없이 박근혜 게이트를 다뤘다.

 

박사모는 헷갈린다. 박정희, 박근혜를 칭송하던 보수언론이 갑자기 박근혜가 최순실 꼭두각시였다는 사실을 제대로 보도하고, 탄핵되는 게 당연하다고 주장하니 헷갈릴 수밖에. 그들은 정말로 대통령이 탄핵당해야 하는 이유를 모를 수도 있다. 그리고 “언론은 쓰레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보수언론이 갑자기 내부자에서 심판자로 바뀐 걸까? 두고 봐야 한다. 보수언론이 이전처럼 진실을 왜곡하고 감추고, 전쟁을 조장하고, 진보를 비방한다면 ‘역시 보수언론은 쓰레기’에 머물 수밖에 없다. 성찰하고 반성해야 한다. 박사모한테 “언론은 쓰레기”라는 칭찬을 늘 받을 수 있는 언론이 되기를 바란다. 이번이 절호의 기회다.

 

그리고 박사모들은 경향신문이나 월간 작은책 같은 진보적인 매체도 좀 읽어보시라.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안건모 | ‘작은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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