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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흘 만에 돌아온 집과 농장은 참 고요했다. 가을색은 더 깊어져 있어서 곱게 늙어가는 귀인처럼 애잔해 보였다.

서울에서 가장 크게 기억에 남는 것은 12일 밤 11시쯤 광화문광장 주무대에서 진행된 ‘시민자유발언’ 시간이었다. 전혀 가공되지 않은 생목소리들에 나는 압도당했다.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랐던 것으로 보이는 여성 연극인이 무대에 섰다. 주어진 3분 동안에 쏟아낼 말들은 너무 많았고 쌓인 울분은 산을 이루었다. 작품과 공연이 거부되었던 그 예술인의 피를 토하는 울부짖음은 얼굴 전체를 큰 눈물덩어리로 보이게 했다. 예술인들의 자유혼을 짓누르고 고통을 기획한 당사자들을 지목했다. 조윤선 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직접 거명했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노동자가 올랐다. 민주노총 조합원으로 보였다.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작년 이맘때 같은 취지로 열린 민중총궐기 행사로 5년 징역을 산다면서, 한상균이 5년이라면 박근혜 대통령은 500년도 모자랄 거라고 했다. 그 노동자의 바위 같은 결기와 노한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아홉 살 어린 나이에 형제복지원에 끌려가 살아야 했다는 중년 아저씨가 농민들 시위 현장에 등장하는 마대 자루 옷을 뒤집어 입고 올라왔다. 12년 동안 513명이 사망한 사건의 진상을 규명해 달라고 부르짖었다.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에 만들어져 1987년 처음으로 세상에 폭로된 형제복지원 사망 사건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다 보니 장애인시설 인강원 사건과 노숙인 복지시설인 대구희망원 사건 같은 것이 줄을 잇는다고 규탄했다. 이화여대생은 최근의 이대사태에 대한 해결책을 요구했고, 고등학생도 나서서 앳된 목소리로 정국을 규탄했다.

아는 선배 수행자가 쓴 시가 인터넷에 올라왔다. 그는 “우리가 정녕 바꾸어야 하는 것은 이 체제, 이 구조, 우리가 살아오면서 길들여진 그 모든 가치관과 삶의 방식”이라고 했다.

그렇다. 권력을 규탄하며 스스로가 권력화되는 것을 경계하고 부정과 비리를 지적하며 자신의 부정과 비리에 면죄부를 주지 않을 자각이 필요할 것이다.

선배의 글은 ‘(혁명은) 지금 여기서 개벽된 그 세상을 사는 것’이라고 했지만, 같이 글을 읽은 곁의 후배는 ‘지금은 분노와 저항을 조직할 때’라고 반발했다.

3일 동안 나는 ‘한살림 30주년 기념 대화마당’에 가서는 행사 주제처럼 ‘성장을 넘어 성숙의 사회로’ 가자면서 죽임의 세상에서 살림운동의 새로운 모색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민중총궐기 대회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외쳤고, 그 주변 공모자들의 동반 퇴진과 처벌을 요구했다. 내 출판기념회에 가서는 ‘유쾌한 소농 이야기’를 했다.

도심 행진과 구호, 부족한 잠 때문에 두 눈은 뻑뻑하고 충혈되어갔다. 거울 속 내 모습도 몇 년 늙어 보였다. 서울의 밤과 낮은 참으로 격동의 연속이었고 내내 소란했다. 도심의 불빛이 소음과 뒤얽힌 기묘한 동거를 목격했다.

먼발치로 은행나무가 부푼 풍선처럼 서 있다. 그 위로 가을 찬비가 내린다. 바람이 살짝이라도 일면 빗방울 머금은 샛노란 은행잎은 한꺼번에 떨어질 판이다. 바람이 아니어도 산골의 정적을 깨고 까마귀 울음이라도 들린다면 우수수 떨어져버릴 듯 아슬아슬하다.

새로운 계절을 맞는 자연의 채비는 엄숙하다. 바람결과 빗방울 하나에도 자신을 하나씩 떨구어낸다. 추위가 몰려오는데도 껴입지 않고 도리어 한 꺼풀씩 벗는다. 엄한 겨울을 견뎌야 할 자연의 겨울채비는 실은 봄채비다. 꽃피울 새봄을 위해 벗고 버리는 것이다. 비상시국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자연의 가르침을 구한다.

전희식 | 농부·‘삶을 일깨우는 시골살이’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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