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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타임. time-out.

경기 시간이 잠시 멈춘다. 뛰던 선수들이 한데 모여 의사소통을 하는 시간이다. 대부분 작전을 논의하지만 사기를 끌어올리거나 상대의 흐름을 끊는 데도 이용된다. 감독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다.

스포츠의 1차 목적은 승리다. 작전타임 역시 승리를 목표로 한다.

꼭 그렇지만은 않다. 지난해 10월17일 프로배구 남자부 현대캐피탈은 대한항공과 시즌 2번째 경기를 치렀다. 선수에서 곧바로 감독이 된 현대캐피탈 최태웅 감독은 3세트 작전타임을 불렀다. 선수들을 모았고 “우린 지금이 중요한 게 아니다. 미래가 중요한 거다”라고 말했다. 경기는 0-3으로 졌다. 11월15일 다시 대한항공을 만났다. 5세트 다시 작전타임. “겁이 난다고 피하면 다음에 누가 해? 미스 해, 과감히 미스 해. 범실해도 상관없어.” 그날 역시 2-3으로 졌다. 최 감독의 메시지는 명확했다. 지금 지더라도 변화를 위해 도전해야 한다는 것. 경기 결과에 호통치는 대신 거꾸로 ‘하지 않는 것’에 대한 경계를 강조했다. 2월2일 KB손해보험과의 경기에서 “못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은 다르다. 오늘은 너희가 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인다”고 작전타임 때 얘기했다.

작전타임이 쌓였다. 변화를 향한 도전이 계속됐다. 최 감독의 말은 ‘어록’이 됐고, 현대캐피탈은 강팀이 됐다. 2월7일 한국전력과의 경기 5세트, 최 감독은 “그렇게 자신감이 없어? 우리는 10연승을 하는 팀이다. 자부심을 갖고 경기하라”고 말했다. 5세트 11-14로 지고 있던 경기를 뒤집었다. 이틀 뒤 OK저축은행과의 경기에서는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너희를 응원하고 있다. 한 번 뒤집어 보자. 이길 수 있다”고 했다. 연승 기록이 17까지 이어졌고, 현대캐피탈은 7년 만에 정규시즌에서 우승했다.

추일승, 유재학, 김승기, 추승균 감독이 프로농구 4강 플레이오프 미디어데이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_연합뉴스

프로농구 KCC 추승균 감독 역시 첫 시즌을 치르는 초보 감독이다. 2월16일 고양 오리온과의 경기였다. 종료 7초를 남기고 70-71로 지고 있었다. 작전타임을 불렀다. 추 감독은 호통 대신 “이겨낼 것이다. 이때까지 다 이겨냈으니 1점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종료 직전 전태풍의 결승골이 터졌고 10연승을 이어갔다. KCC 역시 창단 후 15시즌 만에 첫 정규시즌 우승을 이뤘다.

2014년 4월11일 잠실구장. NC 초보 마무리 김진성은 12-11로 앞선 9회말 2사 만루 위기에 몰렸다. 포수 김태군이 마운드에 올랐다. 야구의 작전타임. 김태군은 “형, 심장이 좀 떨리나? 이게 마무리다, 형. 내가 막아줄게. 다 막아줄게. 자신있게 던져”라고 했다. 김진성은 주무기 포크볼을 자신있게 던졌다. 조쉬 벨을 삼진으로 잡았고, 이후 진짜 마무리 투수가 됐다. 그해 NC는 창단 2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올랐다.

2012년 NBA 파이널 5차전. 1승3패 벼랑 끝에서 또다시 패배 앞에 놓인 오클라호마시티 스캇 브룩스 감독은 경기 종료 직전 의미없는 작전타임을 요청했다. “고개 숙일 필요 없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여름 동안 우리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작전타임은 전술적 모험을 위한 임기응변이 아니다. 흐름을 바꾸고, 분위기를 다잡고, 다음 경기에 대비하는, 함께 모여서 공유하는 메시지다. 변화를 추구하고 자신감을 한데 모으고, 서로를 믿게 만들고, 그렇게 내일을 준비한다.

테러방지법 통과 저지를 위한 야3당의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이 지난 2일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원내대표의 마지막 발언으로 종료됐다. 지난달 23일 오후 더민주 김광진 의원으로 시작해 192시간26분 만이다. 192시간26분간의 작전타임이었다. 누군가는 억지로 외면했지만, 많은 이들이 목소리를 들었다. 역전승은 없었고 법안은 통과됐지만, ‘민주주의’라는 경기는 아직 남아 있다.

이용균 스포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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