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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침공은 어디인가>(2015)에서 마이클 무어는 스스로 미국의 전사가 되어 다른 나라들을 침공하기로 한다. 단, 세 가지 규칙이 있다. 누구에게도 총을 쏘지 말 것, 기름을 약탈하지 말 것, 친애하는 미국인들에게 유익한 것을 가지고 돌아올 것. 총을 쏘지 않고 기름을 약탈하지 않는다면, 진지한 의미에서 미국식 침공은 아니다. 결국 침공은 세 번째 규칙을 위해서다. 무어는 미국인에게 유익한 것을 가지고 돌아가기 위해 이탈리아의 휴가, 프랑스의 학교 급식, 독일의 과거사 성찰, 아이슬란드의 양성평등 그리고 핀란드의 교육을 침공한다.

마이클 무어의 Where to invade next 핀란드 편의 한 장면 캡쳐.

핀란드 침공에서 무어는 묻는다. 예전엔 핀란드 교육이 미국처럼 엉망이었고 학력 수준도 다를 바 없이 바닥이었는데 어떻게 세계 최고가 되었을까. 무어는 적국 교육부 장관을 찾아간다.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핀란드 교육부 장관은 ‘일급비밀’을 털어놓는다. “핀란드 학교엔 숙제가 없습니다.” 경악한 무어는 아이들을 만난다. 상대적으로 숙제가 많을 법한 고학년 아이들은 말한다. “숙제는 없어요. 있다고 해도 10분밖에 걸리지 않아요.” 핀란드 교육부 장관은 이어 말한다. “아이들에겐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이로 지낼 시간, 청소년으로 지낼 시간, 삶을 즐길 시간이 필요합니다.”

한국에서도 핀란드 교육을 주목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공부를 많이 하지 않는데 교과 학력 수준이 높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서 방점은 학력 수준이 높다에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렇게 놀리니 공부를 못할 수밖에 없지. 복지병의 또 한 사례군.’ 비웃고 넘어가지 않았을까. 독일 교육이 여러 장점과 미덕을 가지면서도 한국에서 그리 주목받지 못하는 이유도 학력 수준이 신통치 않기 때문이다. 독일 내에서도 비판 여론이 있지만, 남의 평가 방식(PISA, OECD 국제학생평가 프로그램을 말한다)에 휘둘리지 않고 독일 교육 나름의 철학과 기준을 믿는 사람이 여전히 더 많다. 그리고 인문계 아이들이 대학에 이르고 실업계 아이들이 산업 현장에 이르면 독일 교육의 진가는 확인된다.

한국 아이들의 교과 학력 수준은 핀란드 못지않다. 대신 아이로 지낼 시간, 청소년으로 지낼 시간, 삶을 즐길 시간은 모조리 반납된다. 대학이 민망할 정도의 지적 수준을 보이는 건 그 자연스러운 결과다. 얼마 전 작고한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10여년 전 말했다.

“한국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건 교육이 정반대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학생들은 하루 10시간 이상을 학교와 학원에서 자신들이 살아갈 미래에 필요하지 않은 지식을 배우기 위해, 그리고 존재하지도 않는 직업을 위해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토플러는 한국 교육이 ‘산업화 시대의 인력’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라 평가했다.

토플러는 한국 교육을 오해했거나, 지나치게 많은 의미를 부여한 셈이다. 한국 교육의 목적은 산업화 시대의 인력을 만들어내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오로지 대학 입시에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대학 입시의 목적은 오로지 아이들의 이마에 등급을 새겨 인생을 줄 세우는 데 있다. 토플러가 한국 교육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는, 잘못된 교육이어서가 아니라 교육이 아닌 어떤 것이었기 때문이다.

부모 강연을 하면 굳이 꺼내지 않아도 핀란드나 독일 교육, 혹은 프랑스 학교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 부모들은 볼멘소리를 한다. ‘나도 핀란드나 독일, 프랑스 같은 데 살면 그렇게 하죠. 하지만 한국에 살잖아요.’ 당연히 수긍이 가는 말이다. 그러나 그 말엔 빠진 게 있다. 핀란드나 독일 교육, 프랑스 학교가 처음부터 지금 같았던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사회들 역시 교육 문제로 홍역을 앓고, 부모들은 불안감과 이기적 태도로 만연한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이대로 가면 모두 망한다’는 문제의식이 부모의 연대를 만들면서 변화했다.

문제의식이 부모의 연대를 만들었다는 말은 단순하고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현실에선 무척 어려운 일이다. 문제의식은 대개 ‘현실이 어쩔 수 없다’는 말에 차단되며, 연대보다 각자도생의 태도를 양산한다. 문제의식이 연대를 만들어냈다는 건, 구체적으로 말해서 ‘내 아이만 손해 볼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뚫고 나아가는 소수의 부모들이 있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유럽 노동자들의 연대임금이, 대기업 등 기존의 임금보다 오히려 덜 받게 되는 노동자의 연대로 시작되었음을 안다. 그들은 당장 나만 손해 보는 기분을 누르고 장기적으로 더 이로운 선택을 했다. 아이 문제는 내 문제보다 훨씬 더 많은 두려움과 번민을 안겨준다. 핀란드와 독일, 프랑스 부모들은 그걸 이겨냈던 것이다.

재난상황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한국 교육 현실에서 내 아이부터 살리고 보겠다는 부모들의 태도는 본능적인 것이다. 그러나 (할리우드 재난영화가 반복해서 보여주는 교훈처럼) 재난상황의 가장 큰 특징은, 나부터 살겠다는 본능적 태도가 나를 더 나쁜 상황으로 몰아간다는 것이다.

내가 재난을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사람과 힘을 모으는 것이다. 내 아이를 살리는 유일한 방법 역시 내 아이만 뒤처질 것 같은 두려움을 누르고 다른 부모와 연대하는 것이다. 함께 우리 아이들이 행복할 가능성을 좀 더 높이는 교육 체제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더 손잡을 수 있다면 변화는 시작된다.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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