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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한. 뒤집어도 한국한이라 이름을 잊기 어려운 그는, 같은 5학년이지만 세 살 더 많았고 덩치는 고등학생에 이미 골초였다. 한국한은 이따금 발작이라도 하듯 동네 아이 하나를 골라 이유 없이 때리곤 했다. 결국 나도 그 대상이 되었고 맞서려 한 탓에 매를 벌었다. 하필이면 집 앞 골목에서 한참을 맞고 있는데 그가 움찔했다. 골목 어귀에 어머니가 나타난 것이다. 한국한과 나와 구경하던 아이들이 정지화면처럼 굳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코피를 흘리며 땅바닥에 짓눌려 있는 나를 흘끔 보더니 지나쳐 집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은 얼이 빠진 얼굴로 흩어졌다.

경향신문 DB

동네엔 부잣집이 있었다. 주인이 무슨 공장 사장이랬는데 담이 어른 키를 훌쩍 넘겼고 자가용도 있었다. 그 집에 한 학년 아래 쌍둥이가 살았다. 아이들에게 온갖 못된 짓을 하고 다녔지만 아이들은 물론 동네 어른 누구도 감히 말을 못했다.

어느 날 하교하는 녀석들을 막아섰다. 내 딴엔 말로 주의를 줄 요량이었는데 둘이 달려드는 바람에 싸움이 되었다. 저녁 무렵 그들 어머니가 그들을 양손에 하나씩 끌고 찾아왔다. “곱게 키운 자식들인데 얼굴을 이 꼴로….” 그는 어머니를 세워놓고 고함을 질러댔다.

“아이들 싸움에 어른이 끼어드는 것보다는 저희들끼리 해결하도록 해보는 게….” 어머니의 말은 화를 더 돋울 뿐이었다. “집도 없이 단칸 셋방 사는 주제에….” 한참이 지나서야 그들이 돌아가고, 어머니는 별말 없이 하던 일을 하는데 나는 어머니에게 미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잘못했어요.” 어머니는 나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뭘 잘못했다는 거지?”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그 일들을, 어머니의 행동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가치’를 가르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해했든 못했든 가르침은 나에게 새겨졌고, 그 덕에 나는 삶의 많은 국면에서 나를 지켜낼 수 있었다. 나는 사람이 어떤 가치를 사수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나를 포함하여, 대개의 사람은 가치와 그걸 거스르는 현실적 편익 사이를 비틀거리며 살아간다. 가치는 그 일반적 인생에서 덜 비틀거릴 수 있도록, 적어도 넘어지진 않도록 도와준다.

세상이 좋은 지도자에 의해 좋아진다는 믿음은 미신이다. 세상은 평범한 사람의 삶에서 작은 가치들이 쌓일 때 조금씩 좋아진다. ‘사람이 그러면 안되지’ ‘조금 불편을 겪더라도 쪽팔리게 살 순 없지’ 하는 생각들이다. 세상은 나쁜 지배자에 의해 나빠지는 것도 아니다. 세상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서 작은 가치들이 무너져내림으로써 조금씩 나빠진다. ‘세상이 다 그런 거지’ ‘잘못된 거지만 현실이 어쩔 수 없지’ 하는 생각들이다. 좋은 지도자, 나쁜 지배자는 그런 상황의 반영일 뿐 결코 원인은 아니다.

3년 전까지 몇 해 동안 교육 강연에서 대학입시의 비현실성에 대해 열심히 떠들고 다녔다. 진보적 성향의 중산층 인텔리들은 제 교육관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했다. 그들은 아이 인생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현실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나는 교육관 이전에 그런 생각이 실은 현실적이지 않음을 설득하려 했다. 대학 진학률과 취업의 상관관계만 봐도 전혀 계산이 안 나온다, 대학 입시만 생각하면 낭패 보기 십상이다, 그 비용과 노고의 절반만 투자하여 자립 교육을 모색하는 게 오히려 현실적이다. 그들은 내게 ‘좋은 말씀 잘 들었다’ 인사했지만 돌아서선 ‘현실이 어쩔 수 없지’ 되뇔 뿐이었다. 파국은 예상보다 빨리 왔다. 이른바 일류대 졸업생조차도 절반밖에 취업을 못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부모들은 더 이상 ‘현실이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공황 상태에 빠져 있다. 보수 부모도 가난한 부모도 아닌 그들이 조금씩 힘을 모아 교육을 바꾸려 했다면, 적어도 이 지경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20여년 동안 그들이 ‘현실’만 되뇌다 파탄 낸 현실보다 더 심각한 파탄은 교육에서 가치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아이들은 혹독하게 공부에 시달리지만, 공부가 무엇인지 공부를 왜 하는지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다. 아이들은 오로지 대학입시를 위해 십대를 바치지만 대학이 무엇이며 왜 대학에 가는 건지 질문하거나 생각할 기회는 없다.

4차 산업혁명이니 인공지능이니, 세상이 완전히 바뀌고 있다고들 한다. 현재 교과 교육은 이미 쓸모없는 게 되었고, ‘취업 시대’도 끝나간다고 한다. 파탄 난 교육 상황에 대한 보상심리가 그런 이야기들을 좀 더 부풀리게 하는 면이 있지만, 큰 흐름에선 경청할 만한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 역시 중요한 게 빠져 있다. 사람은 현실 적응 능력으로만 살아가는 게 아니다. 사람에게 더 중요한 건 제 삶의 중심을 잡고 살아가는 것이다. 가치를 배우지 못한 사람은 남과의 비교 가치로만 살아간다. 인생을 우월감과 열등감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땅콩 회항이 어쩌니 갑질 폭력이 어쩌니, 부자의 자식들이 저지르는 패악질이 공분을 일으키곤 한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어쨌거나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문제는 가치를 배우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부자의 아이들이 가치를 배우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폭력보다, 부자가 아닌 부모의 아이들이 가치를 배우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비굴이 조금은 나은 걸까.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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