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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세상읽기

저출산과 저출생

opinionX 2022. 10. 21. 10:32

대한민국 소멸론이 빠르게 번져나가고 있다. 합계출산율, 즉 15세에서 49세까지 가임기 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 지표가 1.0이 안 된다.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단순 인구 재생산조차 어렵다. 2003년 대통령 직속 ‘인구고령사회대책팀’을 설치하고 2005년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까지 만들어 온갖 출산장려 정책을 펼쳤다. 2015년에는 하다 하다 지역별 가임기 여성 분포도까지 만들었다. 이전부터 내오던 통계였지만 저출산 위기를 시각화해서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서란다. 지난 20여년 동안 저출산 극복을 위해 약 380조원의 재정을 투입했지만, 합계출산율은 계속 떨어져 2022년 현재 0.8 아래다. OECD 평균이 1.59인데 한국이 최하위이니, 사실상 전 세계에서 꼴찌다.

저출산 용어를 저출생으로 바꾸자는 주장이 나왔다. 저출산이라는 용어가 출산율 저하의 원인을 여성에게 돌리는 성차별적 언어라는 게 그 이유다. 낳을 산(産)이라는 한자가 여성이 아기를 적게 낳는다는 뜻을 품고 있다. 날 생(生)이란 한자를 사용하면 아이가 적게 태어난다는 중립용어가 된다. 정치적 올바름의 언어로 접근할 문제가 아니라고 인구학자가 목소리를 냈다. 출산율(fertility rate)과 출생률(birth rate)은 이미 학문적으로 다른 의미로 확립된 전문용어다. 번역어의 차이이지 어디에도 성차별적 의미가 들어가 있지 않다. 이를 무시하고 인구소멸의 책임 소재를 따지는 젠더 문제로 보면 안 된다. 인구학자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여성 유권자의 표를 의식한 정치권이 앞다투어 저출산을 저출생으로 바꾸었다.

용어 변경이 아예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출산과 육아의 모든 책임을 여성에게 돌리는 성차별적 구조가 여성의 삶을 고통 속에 몰아넣었다. 사회 전체의 문제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아이가 태어나고 자랄 수 있는 사회 조건을 만들자. 고개를 끄덕거리다가도 의문이 든다. 저출생이란 용어는 괜찮은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아이에게 책임을 돌린 건 아닌가? 물론 이런 의미로 용어를 바꾼 게 아니라고 항변할 터. 하지만 더 큰 문제가 있다. 용어를 아무리 바꾸어도 아이가 많이 태어나는 것이 대한민국에 좋은 일이라는 국가주의적 발상은 끄떡없다. 과연 대한민국에 아이가 많이 태어나는 것이 좋은 일인가? 그 정도로 대한민국이 새로운 생명을 키워낼 수 있는 좋은 사회란 말인가?

지난 15일 오전 6시20분 경기 평택시 한 제빵공장에서 23세 여성 노동자가 샌드위치 소스를 배합하는 기계에 끼여 숨졌다. 원래는 2인 1조로 일을 해야 하지만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역할을 해야 해서 애초에 같은 조 근무라고 볼 수 없다. 기업이 가치 혁신 대신 인건비를 줄이는 노동 착취 방식으로 마구잡이 이윤을 추구한 탓이다. 이러니 사망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2022년 1월부터 9월까지 벌써 77명의 노동자가 끼임 사고로 사망했다. 출산이든 출생이든 대한민국에 태어나면 뭐 하나? 홀로 노동하다 죽어 나가는데.

사회생활 처음부터 비정규노동자로 살아가도록 노동시장을 왜곡해서 평생 자본의 ‘자유’를 위해 노동하다 죽어 나가는 사회. 악한 사회를 만들어놓고 무슨 염치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길 바라나? 대한민국 소멸을 막는다며 책임소재 용어를 바꾸기 전에 생명에 대한 인식부터 바꾸어야 한다. 새 생명, 즉 나중에 오는 자는 먼저 온 자에게는 항상 선물이다.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이야기를 가지고 오기 때문이다. 먼저 온 자는 선물에 감사해서 아무 조건 없이 환대한다. 그것이 육아고 교육이다. 무조건적 환대를 펼쳐야 새 생명이 가져온 복된 이야기가 제 모습을 드러낸다. 출산율 올리기에 앞서, 이미 와 있는 선물을 귀히 여겨 그가 가져온 복음의 불씨가 헛되이 사그라지지 않고 되살아나도록 소중히 돌봐야 한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세상읽기] 저출산과 저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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