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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해 전 몇몇 유럽 국가에서 시작된 극우 돌풍이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다. 독일과 프랑스 같은 국가에서 극우 세력이 두각을 나타내긴 했지만 집권은 또 다른 문제였다. 독일에서는 ‘독일을 위한 대안’의 지지율이 녹색당 돌풍에 꺾였고 프랑스에서도 박빙이었지만 마린 르펜을 누르고 에마뉘엘 마크롱이 연임했다.

그럼에도 유럽 내에서 극우 정당은 점차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이탈리아의 형제들’을 창당한 조르자 멜로나가 이달 말 취임해 이탈리아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될 예정이다. 9월 중순 치러진 스웨덴 총선에서는 ‘스웨덴민주당’이 득표율 20%를 넘기며 제2당에 올랐다. 우파연합 연정에는 스웨덴민주당이 제외되었지만, 우파 부상의 여파로 마그달레나 안드레손 총리가 사임 의사를 밝히는 등 파급은 상당했다. 프랑스에서는 마린 르펜이 이끄는 ‘국민연합’이 우파의 다른 어떤 정당들보다 자주 이슈를 몰고 다닌다.

여기까지는 최근 일어난 일들을 정리한 것으로, 유럽에서 ‘극우’의 궤를 함께하는 정당들이 활동 반경을 넓히고 있다는 것이 요지이다. 강단에서 정당과 관련한 강의를 하다보면 정당 이념과 스펙트럼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기 마련이다. 새로운 관점으로 정당을 소개하고 싶지만 그런 일은 잘 생기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강의자가 긴 시간 동안 그렇게 학습을 받아온 탓이다. 나 역시 좌우 스펙트럼에 의거해 정당들을 분류하고 정당들에 하나하나 성격을 매겨가며 설명을 한다. 그렇게 수업을 마치고 나면 이상한 종류의 회의감이 밀려든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런 이분법에 빠져 있어야 할까, 하는 마음 때문이다. 

‘좌파’와 ‘우파’라는 단어는 프랑스 혁명기에 소집된 국민 의회에서 유래했다. 이 회의에서 중앙 의장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왕당파가, 왼쪽에 공화파가 자리했다. 이후에도 온건 개혁 세력이 오른쪽에, 급진 개혁세력이 왼쪽에 착석한 것이 지금의 우파, 좌파에 이르렀다. 18세기 개념을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쓰는 셈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당시의 좌파와 우파는 각각 분파되고 가지를 치는 방식으로 새로운 줄기를 만들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당의 정체성을 판단함에 있어 ‘좌’와 ‘우’는 여전히 가장 우선적인 준거로 사용된다. 

앞서 언급한 유럽의 극우 정당 역시 그렇게 고안된 스펙트럼 어딘가에 자리한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그렇다면 편을 가르고 서로 잣대를 들이대는 일 역시 이 스펙트럼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일까. 더불어 스펙트럼이란 어디까지나 기존 시각과 질서를 답습한 게으른 분류 구도가 아닐까. 나는 수업을 하고 나오면서 그런 생각을 떠나보내지 못하곤 하는 것이다.

독일 총선이 있었던 작년 가을, 독일에는 녹색당 바람이 한참 불었다. 10대, 20대 청년들이 나와 전국적 규모의 환경 운동에 가담했고, 그 덕에 녹색당 지지율도 대폭 상승했다. 총선에서 실제 지지율은 다소 낮았지만 선거를 치르는 동안 녹색당의 힘은 세졌다. 녹색당의 대표였던 아날레나 베어보크는 새로 꾸린 정부에서 외무부 장관으로 취임했다. 

사실 녹색당이 주장하는 바를 잘 곱씹어보면 좌나 우, 둘 중 어느 쪽에도 포함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이념이 아니라 특정 테마를 정강으로 채택한 정당이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독일에서 환경운동을 시작한 사람들은 환경보호와 애향운동을 하던 시민들이었다. 민속과 풍습을 지키자고 하는 보수주의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러니 녹색당이 좌나 우 어딘가에 포함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보고 들은 스펙트럼의 정치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하나의 방증이 아닐까.

작년 독일 총선에서 환경 보호 거리 시위를 지켜보며, 나는 어쩌면 이제 드디어 새로운 구도의 정치가 시작될지 모른다는 일종의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들이 들고 나온 팻말에 쓰인 환경 보호에 대한 열망과 거대 정당들의 지지율 하락이 내게는 그런 신호로 느껴졌다. 기존 질서를 벗어날 새로운 길 앞에 서 있는 세대가 막 거리로 나온 지금, 기성세대도 함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불러일으켰다. 어쩌면 나는 그런 기대를 계속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새로운 정치를 한다는 것은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것, 그것은 기존의 질서에서 한발 더 나아가 새로운 단계로 접근한다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우리를 우물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으로 진입하게 돕는 새로운 방법은 아닐까. 나는 오늘도 그런 생각을 하며, 독일의 정당 이름이 가득 쓰인 칠판을 깨끗하게 닦아내는 방법으로 강의를 마친다.

<최정애 전남대 교수·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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