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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노태우 후보 측이 내건 구호는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였다. 그런데 이제는 대선후보의 통과의례가 된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어떤 이가 생뚱맞은 질문을 던졌다. “보통사람이면 보통사람이지, 위대한 보통사람이란 뭔가? ‘위대하다’와 ‘보통’은 상충되는 개념 아닌가?” 노태우 후보는 이에 대해 “보통사람이 위대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주역인 시대가 위대하다는 뜻이며, 내가 그런 시대를 열 적격자”라고 답했다. 이후 그의 선거 구호는 ‘보통사람의 위대한 시대’로 바뀌었다. 실제 집필자가 누구인지는 모르나, 선거 직전에는 노태우 명의로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라는 책도 발간되었다.

당시 이 선거 구호는 무척 잘 만든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전두환과 함께 내란을 일으킨 주역이자 집권 민정당의 대표였으나, 스스로를 ‘보통사람의 대표’로 자리매김했다. 그럼으로써 한국 정치의 ‘거목’이자 민주화 운동의 ‘위대한 지도자’를 자처한 김영삼·김대중과 차별화하고자 했다. 이 시도는 ‘잘난 사람’을 싫어하는 ‘보통사람’ 일부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에 적잖은 성과를 거뒀다.

이 구호는 노태우 후보의 전력이나 이후 노태우 정권의 행태에 비추어보면 분명 기만적이었으나, 제시한 비전은 87년 6월항쟁으로 분출한 시민 대중의 요구에 정확히 닿아 있었다. 6월항쟁은 미완의 혁명 4·19가 제기했던 의제들을 전면적으로 소생시켰을뿐더러, 대중 민주주의의 실질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움직인 세계사적 흐름과도 부합했다. 당시 시민들의 보편적 요구는 국민 일반의 의사가 배제되는 특권층 독재의 시대를 끝내고 명실상부한 국민주권의 시대를 열자는 것이었으며, 이를 집약적으로 표현한 것이 ‘직선제 개헌’이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대중의 평균적 지식을 ‘상식’으로 설정하고, 그 상식에 입각한 ‘정의’를 구현해 나가는 것이 민주주의의 본질이라는 태도가 폭넓게 자리 잡기 위해서는 교육의 일반화, 곧 대중교육이 전제되어야 했다. 교육받은 대중이 자신을 정치적 주체로 재정립하는 과정은 곧 ‘특출한 소수’가 역사를 만든다는 영웅주의 역사관이 쇠퇴하고 ‘보통사람’을 주역으로 삼는 역사관이 부상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68혁명을 전후하여 유럽 역사학계에서 미시사, 생활사, 일상사 등 ‘보통사람’의 삶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흐름이 출현하고 성행한 것도 이 때문이다.

역사학은 가장 오래된 학문이지만, 중세까지 이 학문이 주목한 ‘사람’들은 군주와 영웅뿐이었다. 한자어 ‘영웅(英雄)’은 ‘가장 뛰어난 사람’을 지칭하나, 이에 상응하는 영어 ‘히어로(hero)’는 ‘서로 다른 종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라는 뜻의 ‘헤테로(hetero)’와 어원이 같은 단어로, 본래는 ‘반인반신(半人半神)’을 의미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의 사생아들, 기독교의 유일신인 하나님과 사람인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예수 등이 히어로였으며, 히어로가 보통사람들을 구원하는 과정이 곧 역사였다.

동양에서는 황제에게 신과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반인반신의 자격을 부여해 ‘천자(天子)’로 지칭했다. 중세 동양의 역사관 역시 천자와 왕이 천신(天神)을 대신해 보통사람을 구원하는 과정을 ‘주(主)’로 삼고, 성인군자와 영웅의 이야기를 ‘종(從)’으로 삼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보통사람은 구원의 대상이자 역사의 객체였을 뿐이다.

근대 국민국가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역사에서도 신화의 비중은 줄고 ‘사람의 이야기’가 늘었으며, 숱한 민족 영웅들이 발굴되어 ‘위인(偉人)’으로 통칭되었다. 특히 신분제의 소멸과 경쟁사회의 형성은 신(神)과 혈연으로 이어진 본래적 의미의 히어로 대신, 자기 힘으로 위업을 이룬 위인과 ‘인간 영웅’들을 역사의 새 주역으로 부상시켰다. 우리나라에서도 19세기 말, 20세기 초는 국내외 위인과 영웅들이 집중적으로 발굴되고 소개된 시기였다. 이 무렵 신채호는 을지문덕, 묘청, 이순신 같은 영웅들이 출현하여 망해가는 민족을 구원해 주기를 갈망했으며, 안중근은 ‘시대가 영웅을 만드는가, 영웅이 시대를 만드는도다’라고 읊으며, 스스로 영웅이 되고자 작정했다.

영웅과 위인을 모범으로 삼아 보통사람들에게 본받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국민’을 만들기 위한 근대 국민국가의 일반적 기획이었으나, 이는 위인과 보통사람을 대립시킴으로써 대중 민주주의와는 상충할 수밖에 없었다. 위인을 숭상하는 시대의 국민이 계몽하는 자와 계몽당하는 자로 나뉘는 건 당연했다. ‘보통사람의 역사’를 발굴하려는 의지를 자극하고 ‘보통사람의 시대’를 선언하게 만든 것은 ‘위인의 시대’와 결별해야만 민주주의의 실질을 확보할 수 있다는 인식이었다.

물론 어떤 역사관이든 모든 사람의 의식에 균일하게 자리 잡지는 못한다. 어느 시대에나 수백년 전의 과거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보다 앞서 미래를 사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그럼에도 최근 우리 사회에서 빈번히 표출되는 행태와 발언들을 보면,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우려를 떨치기 어렵다. ‘민중은 개·돼지’라는 고위 관료의 발언은 엘리트주의와 위인 숭배 의식의 직접적 산물이다. 이와 완전히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행위가 산 사람의 ‘위인전’을 쓰고, ‘찬가’를 지어 바치며, ‘동상’을 세우는 일이다. 민주주의 발전에 필요한 일은, 나라와 국민을 구원할 위인을 찾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 개개인이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위인 숭배의식의 소생은, 민주주의의 심각한 위기 징후이다.

전우용 |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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