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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여적]2017년의 불온서적

opinionX 2017. 1. 10. 11:15

프랑스 사상가 몽테뉴가 1588년 <수상록>을 완간하자 로마교황청은 불온서적으로 낙인찍고 “어떤 언어로도 출판할 수 없다”고 했다. 로마교황청이 <수상록>을 300년간 금서(禁書)목록에 올렸던 것은 “도덕적 타락에 관용을 베풀었다”는 단 한 가지 이유에서였다. 루소의 <에밀>은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책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는 <에밀>이 출간되자 판매금지 처분을 내리고 루소를 구속했다. 루소가 <에밀>에서 기독교 교리를 거부하고 기존 교육체제를 비판했다는 게 구속사유였다. 옛 소련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는 사회주의 혁명 이데올로기를 부정했다는 이유로 출판허가를 받지 못했다. 이탈리아에서 처음 출간된 <닥터 지바고>로 파스테르나크는 195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지만 소련 당국의 압력으로 수상을 포기해야 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나쁜 권력자’들은 금서목록을 작성, 시민의 눈을 가리려 했다. 하지만 금서는 시민들의 잠든 의식을 흔들어 깨워 나쁜 권력자를 위협하는 ‘사상의 무기’가 되곤 했다. 한국의 군사정권 시절이 그랬다. 박정희 정권은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 마르쿠제의 <이성과 혁명>, 박현채의 <민족경제론> 등 50여권을 금서로 분류했다. 전두환·노태우 정권 시절에는 마르크스의 <자본론>, 염홍철의 <제3세계와 종속이론>, 조성오의 <철학에세이> 등 200여권이 불온서적으로 낙인찍혔다. 대부분 1970~80년대 대학생들에게 ‘사상의 은사’가 됐던 시대의 명저들이다. 금서는 한마디로 시대와 불화하는 책이자 당대의 금기에 도전하는 책이다.

최근 검찰이 전자도서관 ‘노동자의책’을 운영하는 이진영 대표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면서 130권의 책을 불온서적으로 간주했다. 검찰판 ‘2017년 불온서적 목록’에는 파울로 프레일리의 <페다고지>, 존 리드의 <세계를 뒤흔든 10일>, 마르크스의 <독일 이데올로기> 등이 포함돼 있다. 모두 국가의 안보와 상관이 없는, 권장도서 목록에 올라야 할 고전들이다. 당대의 금기와도 상관없고, 그 때문에 전혀 긴장감도 없는 책들이다. 19세기 검찰이 21세기 시민을 이런 식으로 통제하겠다는 발상이 놀랍다.

박구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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