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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심지어 목숨을 잃었다. 긴장과 단절, 공포가 일상화하면서 개인 삶도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전염병은 경제·사회 시스템과 시장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퍼지면서 주가가 폭락하고 원·달러 환율은 폭등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급여가 줄고 실업자들은 늘고 있다. 정부가 그렇게 잡으려고 했던 강남 아파트 가격도 상승세가 꺾였다. 

그런 코로나19도 한국 사회 만악의 뿌리인 사교육에는 별로 힘을 쓰지 못하는 것 같다. 집단감염 우려로 학교는 문을 닫았지만 학원은 학생들로 다시 붐비고 있다. 서울은 이달 중순만 해도 학원 10곳 중 3~4곳이 쉬었지만 대부분 다시 문을 열었다.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고, 공급이 또다시 수요를 창출하고 있다. 대치동과 목동의 유명 단과학원과 오피스텔 교습소는 학교 수업 공백으로 오히려 특수를 누린다고 한다. 대입 학원과 기숙학원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좁은 공간에서 아이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 수능시험 공부를 하고 있다. 평시든 비상시든 호황이든 불황이든 사교육에 브레이크는 없다.

게임 이론의 고전적사례인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는 서로 믿고 협력하면 모두에게 이익이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해 모두 피해를 보는 상황을 일컫는다. 학생과 학부모가 바로 딜레마에 빠진 죄수 처지다. 

공범이 두 명 있다. 둘이 모두 범죄를 부인하면 무죄다. 둘 다 자백하면 유죄다. 한 사람만 자백하면 그 사람은 무죄이지만 부인한 사람은 더 큰 벌을 받는다. 둘 다 부인하는 게 최선이지만 상대방을 믿지 못해 둘 다 자백하고, 모두 감옥에 간다는 게 죄수의 딜레마 결론이다.


집단감염 우려에 학교 문 닫아도

학원은 학생들로 다시 붐비는 중

남에게 뒤처질까 두려운 부모들

아이의 건강이 위협받는데도

사교육에 돈 쏟아붓기 못 멈춰


사교육도 똑같다. 학생과 학부모들이 모두 약속을 하고 한날한시에 학원 수업이나 과외를 딱 끊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만 되면 사교육 경쟁은 끝난다. 부모는 돈을 아끼고, 아이들은 공부 부담을 덜 수 있다. 입시가 보다 공정해지고, 계층 이동 사다리가 복원된다. 하지만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물리적 거리 두기’ 총력전이 펼쳐지는 상황에서도 아이들은 학원에 간다. 일부는 수강생이 줄어든 지금이 성적 올리기에는 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사교육을 하기 때문에 사교육은 그 자체로 성공을 보장하지 못한다. 수도권 인기 대학에 합격한 상위 10% 정도만 본전을 건진다. 90%에겐 결과적으로 돈 낭비, 시간 낭비일 뿐이다. 사교육은 사회의 인재 선발도 방해한다. 입시는 사회에 필요한 우수 인재를 뽑는 기능이 있지만 부모의 경제력 덕분에 높은 점수를 받은 학생을 우수 인재로 잘못 뽑는 결과를 초래한다.

사교육의 폐해가 크고 당장 학생들의 건강이 위협받고 있지만 교육당국의 조치는 학원에 휴원을 권고하는 수준이다. 정부에 협조하지 않으면 제재하겠다고 엄포를 놓지만 뾰족한 대책이 없다. 학부모와 학생들을 강제로 말릴 수도 없다. 1980년대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의 ‘과외 금지령’은 민주화 이후 위헌 판결이 났다.

차선책은 학교 휴업 동안 정부가 양질의 교육 프로그램을 신속하게 제공하는 것이지만 이번 코로나19 국면에서도 공교육은 사교육에 밀렸다. 교육부가 지난 2월 중순 개학 연기 결정을 내리자 사교육업체들은 곧바로 온라인 특강을 편성했다. ‘일타’ 강사들은 2월 말부터 마치 개학한 것처럼 1교시 2교시 시간표를 짜서 인터넷 강의를 제공하고 있다. 교육방송(EBS) 인강이 호평을 받고 있지만 사교육만큼 빠르지는 못했다. 일선 학교는 당초 개학날인 3월2일 즈음 비상연락망을 가동해 학생들에게 학습 계획표와 독서 목록 등을 배포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이미 2~3주일 전 학원에서 수백장의 신학기 수학·영어 학습 자료와 과제물을 받은 터였다.

지난해 초·중·고교 학생은 545만명으로 1년 전보다 13만명(2.4%) 줄었지만 사교육비 총액은 21조원으로 2018년(19조5000억원)보다 7.8% 늘었다. 상황이 더 나빠졌다. 학벌 폐해와 학력 차별도 여전하고, 교육당국은 무기력하다.

죄수의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신뢰다. 사교육 문제의 해답도 같다. 하지만 어떻게 상대를 믿으란 말인가. ‘남이 안 한다는 보장이 없는데’ ‘남이 사교육을 안 할 때 나만 하면 대박인데’. 코로나19로 아이의 건강이 위협받고 가장이 언제 회사에서 잘릴지 몰라 걱정하면서도 매월 수백만원씩 사교육에 쏟아붓는 현실이 한 편의 부조리극 같다.

<오창민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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