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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 출신의 시인 칼릴 지브란이 쓴 <예언자>는 속독이 필요치 않다. 느릿느릿 행간의 의미를 곱씹으면서 읽는 게 낫다. 난해하거나 사전지식이 필요해서가 아니다. 짧고, 평이한 글로 삶의 지혜를 일러주기 때문이다. ‘메마른 영혼을 적셔주고 삶의 나침반이 돼주는 잠언록’이란 다소 상투적이고 과한 상찬(賞讚)도 있지만 눈으로 읽기보다, 가슴으로 느끼기에 제격이다.
지브란은 <예언자>에서 부모들이 새겨들을 만한 얘기를 들려준다. 그는 부모는 활, 자식은 화살에 비유했다. 지브란은 “활이 흔들리지 않아야 화살도 제대로 날아간다”고 했다. 부모도 마찬가지다. 부모가 흔들리지 않아야 자식도 제대로 성장한다. 화살은 활이 많이 휘어야 멀리 날아간다. 한데 활의 휘어짐은 고통이다. 활의 고통이 클수록 화살은 멀리 날아간다. 부모도 그렇다. 등이 휘는 고통이 있어야 자식은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자식이 ‘등골 브레이커’가 아니어도 부모의 등은 휘게 마련이다. 자식이 ‘오포 세대(연애·결혼·출산·인간관계·내집마련을 포기한 세대)’라 해도, ‘장그래’만도 못한 비정규직이라 해도, ‘찰러리맨(취업 후에도 부모에게 기대어 사는 샐러리맨)’이라 해도 감싸안고 자신들의 등이 덜 휘어 그리 된 것은 아닌지 자책하는 게 부모다. 자식이 ‘완생’이 될 수 있다면 등이 더 굽고, 더 휘는 고통을 얼마든지 감내하는 게 부모다.
다큐멘터리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에 나오는 강계열 할머니는 초겨울 어느날 남편 조병만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읍내 시장에 간다. 내의를 파는 상점에 들른 강 할머니가 아동용 내복에 눈길을 주자 상점 여주인은 “나이가 어찌 되나요?”라고 묻는다. 강 할머니는 “셋은 다섯 살이고, 셋은 여섯 살인가?”라며 희미해진 기억을 더듬는다. 강 할머니는 12남매를 낳았다. 하지만 6남매는 대여섯살 때 숨졌다. 6남매를 앞세운 지 반백년이 지났지만 강 할머니는 아이들 내복도 제대로 입히지 못한 게 한으로 남았다. 강 할머니는 남편에게 “먼저 간 사람이 아이들에게 내복을 전해줍시다”라고 말한다. <님아…>에는 76년간 연인처럼 살아온 노부부의 살가운 사랑만 있지 않다. 등이 휠 정도로 뒷바라지하다 품 밖으로 내놓은 6남매뿐 아니라 가슴에 묻은 6남매를 잊지 못하는 애절한 모성애도 있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덕수는 흥남부두에서 헤어진 아버지 사진을 보며 “저 이만하면 잘 살았지예? 근데 진짜 힘들었거든예”라고 혼잣말을 한다. 덕수가 그만하면 잘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잘 살았다’는 개념의 모호성 때문이다. 덕수가 죽을힘을 다해 살았던 때는 한국전쟁과 4·19 혁명, 5·16 쿠데타, 유신독재가 이어진 격동의 시기였다. <국제시장>이 현대사의 주요 사건을 가볍게 다루거나 배제해 과거사를 미화했다는 논란이 불거진 이유다. <국제시장>이 기성세대의 퇴행적 정서를 부각하고, 세대 간 불화와 오해를 촉발시키긴 했지만 덕수 또한 자식을 위해 등이 휘어버린 한 가정의 아버지였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 (출처 : 경향DB)
시인 김사인은 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에 실린 시를 통해 등 휘는 가장의 심경을 ‘중과부적’으로 표현했다. “조카 학비 몇푼 거드니 아이들 등록금이 빠듯하다/ 마을금고 이자는 이쪽 카드로 빌려 내고/ 이쪽은 저쪽 카드로 돌려막는다. … (중략)시골 노인들 팔순 오고 며칠 지나/ 관절염으로 장모 입원하신다… 중과부적!” 짐작하건대 삶의 무게에 짓눌리고, 중과부적의 상황에 맞닥뜨리더라도 시인은 기꺼이 자식들의 활이 되지 않을까.
하지만 ‘부러진 활’과 같은 부모들도 적지 않다. 서울 서초동 아파트에서 수면제를 먹이고 아내와 두 딸을 살해한 40대 가장, 경기 안산에서 아내의 전남편 집에 침입해 전남편과 의붓딸을 살해하고 인질극을 벌인 40대 계부….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더라도 일그러진 부모들은 흔하디 흔하다. 남의 아이보다 한 뼘이라도 앞서게 하기 위해 배려보다 경쟁을 가르치는 부모, 자식의 스펙을 조작해 대학에 부정입학시키는 부모, 자신은 ‘삐딱선’을 타면서 자식에겐 바른 길을 가라고 다그치는 부모…. 그런 부모들에게 지브란은 ‘당신의 아이는 당신의 아이가 아니다’라고 조언한다. “그들은 당신과 함께 있지만 당신의 소유물은 아니다/ 당신은 그들에게 사랑만 주고, 생각을 주어서는 안된다. 당신은 그들의 육신은 가두어도 영혼은 가둘 수 없다.” 지브란의 조언에 첨언하면, 활은 화살을 날려보내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게 활의 숙명이고, 존재 이유다.
박구재 기획·문화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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