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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박근혜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은 많은 논쟁과 생각할 거리를 남겨주었고 여전히 그 여파가 진행 중이다. 이미 많은 논평들이 쏟아져 나오기는 했지만, 가장 놀랍게 느낀 것은 박 대통령의 짙은 정치혐오였다. 대통령이 정치인이기를 멈춘 것이다.

대통령은 과연 정치인인가? 매우 단순해 보이는 질문이지만 그 대답이 간단치는 않다. 여기서 정치인이란 말을 편의상 ‘정파적(partisan)’이란 말로 대체한다면 실마리가 보일 것도 같다.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이며 외국에 대해 국가를 대표하는” 기관이기 때문이고, 국민 모두의 지지로 당선되지는 않았어도 국민 모두를 대의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부분(part)’을 일컫는 말에 뿌리를 둔 정당, 혹은 정파적이란 말은 애초에 대통령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여야 정치인들을 하나로 묶어 공격한 대통령은 매우 탈정파적이었고 도덕적 우월성에 대한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서 매우 초월적이었다.

‘국부(國父)’ 혹은 ‘박사’라는 명칭이 더 편했던 이승만 전 대통령의 경우가 어쩌면 이러한 초월적 대통령의 이상형일 것이다. 자신을 추종했던 정당, 정치인들을 끊임없이 부정, 멸시, 말살하고 독촉국민회, 한민당, 자유당 등으로 끊임없이 여당을 갈아치우면서도, 정치를 초월한 국민의 아버지이자 시대의 현인으로 추앙받고 싶어했다. 권력을 향한 끊임없는 투쟁을 전제로 한 정치는, 대통령이라는 권력의 정상에 다다른 이에게는 너절하고 비천한 일로 보였을 것이다.

 



더 극단적으로 정치와 정당을 초월했던 이들은 이후 권위주의 정권의 대통령들이다. 이들은 정치인들을 정화(淨化)하고 정당을 소각한 무균진공의 공간에 준국가기관인 공화당과 민정당을 ‘설치’했는데, 아마 무질서한 투쟁과 지저분한 갈등이 없는 ‘아름다운 정치’를 꿈꿨을지도 모른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정치란 개념을 거부했다면 이들은 정치 공간 자체를 멸균했다는 차이는 있지만, 정치를 초월한 대통령이라는 의미에서는 매우 흡사하다.

민주화와 민주주의의 성숙 과정이라는 것, 그리고 근대적 정치라는 것은 이러한 ‘초월자적 대통령’의 신화를 극복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스스로를 ‘보통사람’이라 칭했던 것이 과연 우연이었을까? 영수회담(領袖會談)이란 말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야당을 국정 파트너로 인정하면서부터였고, 당정(黨政)협의란 말이 당정청(黨政靑)협의라는 말로 바뀐 것은 국회와 대통령의 직접적인 소통창구로서 여당의 역할이 강조되는 장면이었다. 민주주의 한국의 대통령은 심판이 아니라 선수이며, 정파를 초월한 지도자가 아니라 선거에서 이긴 정파의 지도자이다.

초월자적 대통령은 그 이름만큼이나 매력적이며 정치혐오증의 이면이기도 하다. 사익의 지배를 받는 무능하고 비효율적인 ‘정치’보다 관료제로 무장한 대통령의 ‘행정’은 몇 배나 더 효율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통령의 정치혐오증을 우리 사회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가 지저분하고 비효율적이라고 해서 없애거나 축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침에 밥알을 씹고 저녁에 화장실을 가는 것과도 같은 과정이라는 점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사회 갈등을 찾아내고 그것을 짚어내거나 터트리는 일이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정치가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면, 정치가 문제 해결에 서투르고 비효율적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박 대통령의 지난 선거와 당선 과정을 상기해보면, 그것이 이러한 사회 갈등의 줄기를 짚는 ‘정치’의 과정이었고, 여전히 그 작업을 멈추면 안된다는 의미에서, 대통령은 계속 정치인이어야 한다.

이상의 논의를 책임정당제라는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박 대통령이 새누리당 공천을 받아 당선된 것은 변하지 않을 사실이며, 여전히 새누리당의 핵심 지도자라는 사실도 변하지 않는다. 대통령이 진정한 미래의 비전을 정책으로 구성하고 실현하는 것은 혼자서는 불가능하고 자신의 정당에서 리더십을 발휘함으로써, 그리고 그 정당을 통해 이어진 사람들을 설득하고 이들과 협력하는 과정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이처럼 후보자가 정당과 같이 비전을 만들고, 이를 정책적 공약으로 구체화하며, 선거에서 평가받는 과정, 이것을 당선 후 구현하고 재평가받는 과정을 책임정당제라고 부른다. 한국 정치의 비극이라는 것은 대통령이 정당을 통해 당선된 후, 자기 정당을 ‘초월’하고, 이후에는 다시 그 정당에 의해 부정되는 과정을 반복해 왔다는 사실이며, 이것이 쉽사리 가까운 시일에 바뀔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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