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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월16일 군사쿠데타로 청와대를 장악했던 박정희 소장. 그는 시청 앞에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나타나, 2년 동안만 군정을 한 뒤에 민정에 이양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비밀리에 김종필에게 지시했다. 공화당 창당 등 쿠데타 세력의 정치참여를 위한 철저한 준비를 은밀하게 시작했다. 2년 뒤 박정희와 김종필은 군복을 벗고 정치에 참여했다. 군복을 벗고 민간인 신분으로 정치를 하니 약속 위반은 아니라고 했다. 1969년 9월14일 새벽 2시 국회 별관. 박정희의 개인적 정치도구로 전락한 공화당 의원들은 대통령의 3번 연임을 골자로 한 3선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김대중의 강력한 도전을 받았던 박정희는 1971년 대선 마지막 유세에서 “이번 선거가 국민들에게 표를 달라는 마지막”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1972년 10월 자신의 영구집권을 토대로 한 유신체제를 선포했다. 박정희의 절대권력 시대가 열렸다.

피살된 모친 육영수 여사를 대신해 박근혜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시작하던 때는 1974년, 그녀의 나이 22살이었다. 절대권력자 박정희 옆에서, 권력을 어떻게 연장하고 지켜나가야 하는지 그 생리를 철저하게 배웠을 것으로 보인다. 권력투쟁과 관련된 후계자 수업을 박정희가 시켰는지, 안 시켰는지 알 수 없지만, 만약 박정희가 살아서 권력을 넘겨주었다면 그의 딸 박근혜가 1순위가 아니었을까 싶다. 독재 권력자의 생리상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시나리오다. 그러나 부친의 죽음을 맞고 나서 20여년 뒤, 정치인 박근혜는 아버지로부터 권력을 세습받지 않고 스스로 선거에 나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당선 배경은 작고한 부친의 후광이 절대적이었지만, 하여튼 그녀는 합법적인 임기 5년의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었다. 물론 당시 미국의 타임지에서는 ‘독재자의 딸’로 기사 제목을 뽑았다.

 

3선 개헌 국민 투표하는 박정희 대통령 부처(1969년)_경향DB


임기의 절반을 돌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 권력 핵심 주체인 여당에서부터 박 대통령 권력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충성과 배신의 건달문화가 박근혜 정권의 핵심부에서 벌어지면서, 대통령의 심기가 어긋나고 있다. 국회가 견제와 비판의 기능을 회복하고, 집권여당이 상대적 독립성을 회복하는 전향적인 민주적 정치문화가 배신의 계절로 낙인찍히고 있다. 아마도 여의치 않으면, 박 대통령은 자신의 30% 콘크리트 지지율과 대통령 권력을 등에 업고 신당 창당에 적극 나설 것이다. 충성과 배신이 공천 기준이 되는 친박 신당이 내년 총선 전에 만들어질 수도 있다. 레이저에 쏘인 배신자들을 대구·경북에서 줄줄이 낙선시키고, 오롯이 충성분자들이 박 정권 사수를 위해 국회에 입성한다. 물론 이 시나리오는 여권의 거센 반대에 부딪힐 테고, 김무성 대표가 공천권의 일부 양보를 통해 꼬리 내릴 확률이 높지만, 박 대통령의 최근 눈빛을 보면 소름 돋는 권력 배타성을 느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절대권력은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사회경제적 물적 토대를 가진 자들의 구조로 정립하면서 유지되었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최측근에게 암살당하면서, 내부 붕괴로 그 절대권력의 최후를 맞게 된다. 20세기 말 공산주의 국가들이 멸망한 이유는 민주적 정치를 외면하고 전체주의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반면 자본주의가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민주주의가 정치적으로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권력의 물화, 권력의 아집에만 사로잡혀, 그것이 정치의 전부인 양 착각하면 큰 낭패를 볼 수도 있다. 1인 유아적 권력 추구는 생존을 건 권력투쟁을 불러온다. 그것도 내부 권력 핵심부에서 발생한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서 증명하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소중함, 민주적 가치의 존중이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권력을 지탱할 수 있는 유일한 힘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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