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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세상이 많이 달라졌구나 하고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 가끔 친구들과 탁구장에 가서 탁구를 쳤는데, 그때 탁구장 손님들은 교복 입은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탁구를 치는 시간은 30분 단위로 끊어서 요금을 냈는데, 돈이 없던 시절이라 계속 시계를 봐가면서 쳤고, 드디어 시간이 다 되면 아쉽게 발길을 돌리던 추억이 아련하다. 정년퇴직 후 다시 탁구에 재미를 붙여 자주 탁구장에 가고 있는데, 반세기 전과 너무나 다른 풍경이 전개된다. 탁구장에는 학생들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고, 대부분 내 또래의 어른들이 열심히 라켓을 휘두르고 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한 반에 우표수집하는 친구가 있었다. 학교에 우표첩을 가져와서 자랑을 하기에 구경을 한 적이 있는데, 부러운 마음에 나도 우표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 친구의 화려한 소장 우표에 비하면 나의 수집 실적은 지극히 초라했다. 기껏해야 우리 집에 오는 편지봉투에서 떼어낸 몇 장의 우표가 고작이었다. 가끔 우표상에 가서 우표 구경을 하기도 했다. 탐나는 우표가 많았지만 가난한 시절이라 감히 돈 주고 우표를 사는 것은 엄두를 못 냈다. 당시에는 우표수집 취미를 가진 친구들이 꽤 많았고 서로 우표를 교환하기도 했다. 요즘 우연히 그때 우표를 마주치면 옛날 생각이 난다. 그런데 요새는 우표수집하는 학생들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요새 학생들은 탁구도 안 치고, 우표수집도 안 하고 도대체 무슨 취미로 살아가나 궁금해진다. 어디 탁구와 우표뿐이랴. 청소년들 사이에 과거에 많이 하던 놀이, 운동, 취미가 거의 사라지는 추세에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아마도 그 빈자리를 휴대전화와 게임이 메우고 있는 것 같은데, 이런 추세가 학교 입시의 압박 때문인지 또는 다른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다. 하여튼 이런 변화는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 측면에서 매우 걱정스럽다.

우정사업본부에서 박정희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을 취소하기로 결정했다는 뉴스가 들린다. 이 우표는 작년 봄 구미시에서 발행을 신청하여 우정사업본부에서 회의에 부친 결과 만장일치로 통과되어 원래는 올 9월쯤 발행할 예정이었는데, 이번에 재론에 부친 끝에 발행이 취소됨으로써 결국 없던 일이 된 것이다. 참으로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박정희 우표는 이미 엄청나게 많다. 1980년에는 추모 우표가 나오기도 했다. 박정희 집권 18년 동안 대통령이 뻔질나게 우표에 등장했다. 외국 원수가 한국을 방문하면 의례히 외국 원수와 박정희의 얼굴이 나란히 우표에 등장했다. 이런 관행은 전두환 정권 때까지 계속되어 박정희·전두환이 우표에 등장하는 횟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하나하나 세어보진 않았지만 아마 각각 50종이 넘지 싶다.

왜 유독 박정희·전두환의 얼굴이 우표에 많이 등장하는가? 두말하면 잔소리, 독재자이기 때문이다. 청와대에서 그렇게 명령을 내렸는지 아니면 밑에서 알아서 기었는지는 모르겠다. 대통령이 자주 등장할수록 우표의 품위와 수집 가치는 떨어진다. 심지어 이승만은 본인이 대통령 직에 있을 때 후안무치하게도 탄생 80주년과 81주년 기념우표를 발행했다. 다행히 세상이 많이 바뀌어 지금은 대통령 얼굴이 우표에 등장하는 것은 대통령 취임 때 딱 한 번뿐이다. 그만큼 민주화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자칫하면 이 민주화된 세상에 박정희 얼굴이 다시 우표에 등장할 뻔했으니 이 무슨 시대착오인가.

탄생 기념우표가 이미 나온 이승만, 그리고 하마터면 나올 뻔했던 박정희는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 독재자다. 이승만은 분단, 친일파 중용, 양민 학살, 장기집권, 독재의 책임이 크고도 크다. 박정희는 친일, 동지 배신, 쿠데타, 장기집권, 독재, 여성 유린의 책임이 크고도 크다. 이승만의 독립운동가 배척, 친일파 중용이 있었기에 박정희가 출세하고 쿠데타를 했으니 두 사람은 사실 한 배에서 태어난 쌍생아라고 해도 좋다. 둘 다 자라나는 아이들이 절대로 배워서는 안되는 반면교사다.

한때 이승만과 박정희의 동상을 광화문에 세우자는 정신 나간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제는 이런 소리가 쑥 들어갔다. 촛불혁명 이후 우리 국민이 크게 각성하여 이제는 박정희 숭배의 광풍이 꺼지고 있다. 올 초 실시된 어느 여론조사를 보면 역대 대통령 중 존경하는 인물을 묻는 질문에서 노무현이 47%로 1위, 박정희가 20%로 2위로 나타났다. 20%는 주로 내가 사는 대구·경북에서 나왔을 것이다. 앞으로 대구·경북 사람들이 역사를 제대로 인식하게 되면 20%라는 거품도 걷힐 것이다. 세상이 좋은 방향으로 바뀌고 있어 희망을 준다.

이정우 | 경북대 명예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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